『어느 아버지의 죽음』(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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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우리의 가족구조는 전통적으로 철저한 가부장제를 택해왔다. 가장이 한 가정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다는 점에서 아버지 혹은 남편이라는 존재는 군주국가에 있어서의 왕과도 비교된다. 그러나 가장에게는 절대권력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책임도 부과된다. 권력울 누리는 만큼 가족을 보호하고 이끌어가야 하는 의무도 가지는 것이다.
가장의 권력과 책임은 시대상황이나 인간의식의 변화에 따라 그 양상을 달리한다. 누리는 권력이 져야 하는 책임을 능가하는 시대가 있었는가 하면 권력은 약화되고 책임만 강조되는 시대도 있다. 그같은 권력과 책임의 이중구조속에서 가장은 항상 갈등을 겪게 마련이다. 가정에 대한 지나친 권력행사는 정치에 있어서의 독재의 성격을 띠기 십상이며,책임만을 의식하다 보면 파멸로 줄달음칠 우려도 있기 때문이다.
호암아트홀에서 공연중인 『어느 아버지의 죽음』은 나이들어 아버지나 남편의 권위가 퇴색한 어느 가장의 고뇌와 갈등을 그린 연극이다. 아서 밀러의 희곡 『세일즈맨의 죽음』을 한국적 현실에 맞춰 각색한 이 연극은 오늘날 우리 사회 가장의 위상이 어떤 것인가를 리얼하게 보여준다. 때마침 옳지 못한 방법으로 자녀들을 대학에 입학시킨 「부정의 부정」이 사회를 온통 벌집 쑤신듯 시끄럽게 하고 있는 터에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자동차 사고를 가장해 자살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많은 아버지와 남편들이 「내 가정을 위해」 「내 자식들을 위해」 저지른 온갖 부정과 비리들이 온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지만,대부분의 아버지와 남편들은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기 위해 안간힘을 쏟고 있다. 아내와 자식들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이해할 수 없는 가장의 고뇌와 갈등은 이 작품이 처음 발표된 40년대 후반이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현역 국회의원이기도 한 최불암씨가 타이틀 롤을 맡고 있는데 그의 중후한 연기가 정치인으로서의 또다른 역할을 보여주는 것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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