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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35)<제89화>내가 치른 북한 숙청|남로당파 제거(12)|전 내무성부상 강상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남로당파 숙청이 있기 전까지는 소련파 뿐 아니라 남로당파·연안파·빨찌산파·국내파 등 각 파별 간부들도 끼리끼리 모여 식사를 하거나 술자리를 갖고 생일과 결혼기념파티·야유회 등을 통해 정담을 나누곤 했었다.
그러나 극비리에 추진되던 남로당파 간부들에 대한 내사와 감시가 수면위로 부상, 검거선풍으로 치닫자 이 같은 정담분위기는 하루아침에 자취를 감췄다.
특히 평소 계파를 초월해 박헌영의 지도노선을 지지하거나 이승엽 등 남로당 핵심간부들과 친분을 유지했던 당·정간부들은 일들과의 친분흔적을 감추느라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어떤 간부들은 박헌영·이승엽 등과 함께 찍은 사진과 박헌영에 관한 자료 등을 모두 불태우기도 했다.
이 같이 대부분의 간부들이 시국의 변화에 따라 적자생존 쪽으로 기울고 있는 가운데 남로당파 핵심간부 12명의 검거에 이어 박헌영과 함께 입북한 남로당간부 권오직(주중대사), 정재달(당중앙위원), 이태준(문화예술동맹부위원장), 박문규(농업상사·후에 검열상), 허성택(노동상), 이병남(보건상), 김오성(당중앙위원) 등이 잇따라 검거됐다.
어느 날 술자리에서 내가 박창옥 동지의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비판하자 노동당 조직지도부장 박영빈 동지는 화를 발칵 내며 『박창옥 동무는 김일성 수상 앞에서「수상님, 우리 고려인군단에서 상호동무는 침착하고 경우 바르며 능력 있는 간부이니 기회가 있으면 중요한 자리에 등용시켜야 합니다」고 선전하고 있는데 상호동무는 박창옥 동무를 기회주의자로 몰아 세울 수 있는가』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나는 허가이의 숙청 때 박창옥의 이중적인 성격 등을 지적하면서『박창옥 동지가 나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수상동지에게 천거하는 것과 내가 구를 평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라고 반박했다.
옆에서 듣고 있던 기석복·정률 등 동무들도『상호동무의 비판이 옳다』면서 『영빈동지가 창옥 동지와 한통속이 되어 당 조직의 지도가 약간 기회주의적인 경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당내 여론도 있으니 참고 해야할 것』이라는 따끔한 충고도 했다.
우리들의 이런 대화는 당시 평양의 분위기로는 절대 용납 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이국땅 소련에서 온갖 박해를 받고 살아온 고려인 2세 군단의 친구들이어서 가능했다.
내가 박창옥 동지의 방을 찾아간 것은 출세의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그에게 눈 도장을 찍으러 간 것이 아니고 숨막히게 돌아가고 있는 정국의 흐름을 읽기 위해서였다.
박창옥은 예고 없이 찾아온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남로당간부들의 숙청사업을 화제로 꺼냈다.『상호동무, 주중대사 권오직이 왜 붙잡혀 왔다고 생각하오.』
『부장동지, 한직에 있는 제가 중앙당에서 별이고 있는 사업의 내막을 알 리가 있습니까.』
『권오직을 선두로 하는 외무성내의 종파분자일당들이 당과 공화국에 대한 인민의 신뢰를 특정 개인에 대한 신뢰로 바꾸려고 했소. 따라서 이 자들의 개인 영웅 주의적 활동은 당과 공화국에 크나 큰 해독을 주었으니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해야 하오. 이 종파분자들 속에 주소대사 주영하도 들어 있소. 주영하도 즉시 조국으로 소환해 조사하도록 내무성에 지시를 해 놓았소.』 공화국의 두 주춧돌 격인 소련과 중국에 주재하던 대사들에게 부종파주의자」라는 딱지를 붙여 소환, 조사 후 구금한다는 사실은 진행중인 숙청의 강도를 보여주는 확실한 메시지였다.
주중대사 권오직은 서울에서부터 박헌영의 핵심참모였고 주소대사 주영하는 해방 전부터 박헌영과 함께 공산주의 운동을 했던 국내파 토착 공산주의자였다.
따라서 이들은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의 천거로 대사에 기용된 것이다.
몇 해전 역시 토착공산주의자였던 오기섭을 「조선의 트로츠키」 라 하여「우익화 경향」을 비난하고 그의 숙청에 앞장섰던 주영하도 이제 김일성 수상의 남로당파 숙청의 제물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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