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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연재] "내 이름 석 자를 최고 브랜드로"

중앙일보

입력

월간중앙‘황창규’와 ‘반도체’는 다른 의미일까? 그렇다면 ‘안철수’와 ‘바이러스’는? ‘빌 게이츠’가 곧 ‘컴퓨터’이듯 이들의 이름 석 자는 설명이 필요 없는 업종의 대명사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부산고’가 ‘지방 최고 명문고’의 대명사인 것과 마찬가지다.


‘Mr. 반도체’ 황창규 삼성전자 반도체 총괄사장은 학창시절 두 번에 걸친 IQ 테스트에서 138과 140을 기록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천재인지 아닌지 약간의 논란이 있을 법한 수치다. 하지만 그는 “천재 한 명이 10만 명을 먹여 살린다”는 이건희 삼성 회장으로부터 ‘천재급 리더’로 평가받았다. 게다가 실제로 10만 명이 훨씬 넘는 삼성전자 반도체부문 식구를 먹여 살리고 있으니 천재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부산고 시절 황 사장의 꿈은 물리학자였다. 당시 미국과 소련의 우주선 경쟁에 영향을 받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각종 실험을 통해 물리 이론을 재구성해 보는 실용물리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의대에 가라는 가족의 권유를 뿌리치고 전기공학과를 택했다. 서울대 공대 시절 집과 도서관을 오가는 단조로운 생활을 하던 그는 3학년 때인 1975년 인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서적과 접하게 된다. 인텔의 창업자 앤디 그로브가 쓴 반도체 이론서 였다. ‘Mr. 반도체’ 부산고 시절 물리학 심취 반도체에 후기산업사회의 미래가 있다고 직감한 그는 반도체를 본격적으로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이어 1977년 세계 최초로 트랜지스터를 개발한 윌리엄 쇼클리가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그는 꿈을 더욱 구체화한다. 쇼클리 같은 위대한 반도체 엔지니어가 되겠다는 것. 해군사관학교 교수요원으로 군 복무를 마친 뒤 1981년 미국유학 길에 올라 1985년 매사추세츠 주립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땄다. 박사과정을 마치고 나면 누구든 편히 쉬며 보상받고 싶어하지만 황 사장은 IBM이나 텍사스 인스트루먼츠(TI)의 스카우트 제의를 뿌리치고 스탠퍼드의 책임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학교 가까이에 실리콘밸리가 있어 더욱 실질적인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실제로 그는 그곳에서 윌리엄 쇼클리 같은 대가들을 직접 만났다. 이 시절의 경험이 ‘Mr. 반도체’로 불리는 오늘의 황창규 사장을 만드는 밑거름이 됐음은 물론이다.

▶(왼쪽부터) 구자신 쿠쿠 회장, 김정만 LS산전 부회장, 김정우 종근당 사장, 김종렬 하나은행장, 김창록 산업은행 총재

잠시도 멈추지 않은 그의 학구열은 엄청난 횟수의 논문 발표로 이어졌다. 학생도 아닌 연구원이 많은 논문을 발표하자 교수진은 깜짝 놀랐다. 스탠퍼드는 이 열성적인 동양 청년이 연구원생활을 겸하면서 인텔에 자문을 하도록 허락해 줬다. 당시 세계 최고이던 반도체업체 인텔의 기술력을 들여다보며 그의 생각과 시야는 더욱 넓어졌다. 하지만 이때 그의 시선은 이미 일본 반도체업계를 향하고 있었다. 그는 같이 일하던 교수의 소개로 일본 반도체업체를 둘러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1980년대 말 NEC나 히타치 같은 일본 반도체 메이커들은 세계 반도체산업의 중심이고 최전방이었다. 세계 최고의 전자소재학회인 IEDM 심포지엄도 일본어로 진행될 정도였다. 그는 “일본을 넘어서야 세계 최고가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1989년 4월 황 사장은 4년6개월에 걸친 스탠퍼드 연구원생활을 접고 삼성전자에 입사했다. 당시 삼성은 기사와 아파트가 딸린 계약직 임원을 제의했다. 하지만 그는 거절했다. 일본을 꺾기 위해서는 삼성에 뿌리를 박아야겠다는 결심을 했기 때문이다. 황 사장은 임원 자리 대신 ‘담당’이라는 직책을 요구했다. 부장과 임원의 중간쯤 되는 자리였다. 그는 “돈이나 지위가 탐났더라면 다국적기업을 옮겨다니며 몸값을 올리려고 했겠지요. 하지만 저는 제 나이나 경력을 감안할 때 단숨에 임원으로 입사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을 것 같아 거절했습니다”라고 당시를 회고한다. 하지만 막상 처음 접하는 한국의 직장생활은 쉽지 않았다. 오랜 해외생활로 인해 직원들과의 융화도 어려웠다. 우선 상명하복식 의사결정 같은 한국식 관습과 관행은 서구식 토론문화에 익숙한 그와 맞지 않았다. 게다가 내심 1년 후쯤으로 기대했던 임원 승진은 2년이 지나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방인의 괴로움 같은 스트레스가 짓눌러 왔다.

▶(왼쪽부터) 송재병 현대미포조선 사장, 안철수 안철수연구소 의장, 오창석 삼성테크윈 부사장, 이기화 태광산업 회장, 이영복 삼천리 사장

“돌이켜보면 삼성이 저를 테스트한 것 같아요. 그 시절을 견디지 못했더라면 오늘의 황창규도 없었겠지요.” 1991년 말 이사가 되면서 당시 삼성전자의 숙원 프로젝트였던 256메가 D램 개발 책임을 맡게 됐다. 무수한 토의와 실험을 하는 개발 과정을 거쳐 1994년 8월 마침내 세계 최초로 256메가 D램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황 사장은 개화기 사군자 중 매화분야에서 일가를 이루고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고종 곁을 지켜 더욱 유명했던 화원화가(조선시대의 직업화가) 황매산 선생의 친손자다. 혈통 덕분인지 그는 다방면에 걸쳐 재주가 많다. 어떤 주제로도 몇 시간쯤은 족히 대화를 이끌 수 있을 정도다. 조부의 피를 이어받아 미술과 서예에도 조예가 깊고, 운동신경도 뛰어나다. 서울대 공대 시절에는 테니스 대표선수로 몇몇 대회에 나가 우승하기도 했다. 골프 역시 정상급이다. 공식 핸디캡은 6이지만 이븐파 스코어도 여러 번 냈다. 삼성에서는 얼마 전 부산고 선후배가 그룹 홍보팀의 양날개로 기용된 점도 눈길을 끈다. 사장으로 승진해 전략기획실장 보좌역이 된 이순동 전 기획홍보팀장의 후임을 맡은 장충기 부사장과 새로 홍보파트장을 맡은 윤순봉 부사장은 부산고 선후배 사이다. 장충기 부사장은 독서량이 많고 아이디어가 풍부한 전략기획통으로 꼽힌다. 형식을 싫어하는 스타일로 ‘영원한 자유주의자’라는 애칭도 갖고 있다. 윤순봉 삼성경제연구소 부사장이 삼성그룹 전략기획실 기획·홍보팀(홍보파트장)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 가장 눈에 띈다. 이로써 윤 부사장은 300여 명에 달하는 삼성 홍보맨을 이끄는 수장이 됐다. 그동안 홍보 및 언론과 접촉이 많지 않던 윤 부사장이 홍보 수장을 맡게 됨에 따라 홍보팀의 새로운 변화가 예고된다.

▶(왼쪽부터) 이우희 에스원 사장, 이정태 인베스투스글로벌 회장, 이형기 경동도시가스 부회장, 임영학 CJ홈쇼핑 대표

윤 부사장은 삼성경제연구소의 사실상 대변인 역할을 하면서 언론사 강의 등을 통해 언론과의 접촉도 활발히 했던 인물이다. 때문에 홍보 패러다임이 바뀔 것이라는 조심스러운 관측도 나온다. 이른바 ‘어젠다’형 홍보다. 이슈를 따라가는 수동적 홍보가 아닌 직접 의제를 찾고 설정하는 능동적 홍보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평소 그룹 내 아이디어맨으로 경제·금융·사회현상에 대해 탁월한 식견을 갖춘 윤 부사장인 만큼 홍보 방식도 남다르지 않겠느냐는 예측에서다. 윤 부사장은 삼성경제연구소 재직 때 ‘열린 시대 열린 경영’ ‘시나리오 경영’ ‘복잡계 이론’ 등을 쏟아내 사회적으로 큰 담론을 불러일으켰다. 동시에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창조경영’ 등 경영철학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인물로 손꼽힌다. 컴퓨터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더라도 ‘안철수’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안철수연구소 이사회 의장인 그의 유명세는 바이러스 잡는 백신을 개발해 무료로 배포할 때부터 시작됐지만, 그를 잘 아는 부산고 동문들에게는 그의 독특한 인생철학이 더 유명하다. 삼성 홍보실 ‘투톱’ 장충기·윤순봉 안 의장은 1962년 부산에서 태어나 부산고를 거쳐 서울대 의대에 진학했다. 잘 알려진 대로 대학 시절 우연히 친구의 하숙방에 들렀다 컴퓨터에 매력을 느낀 후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리던 1989년 마침 자신의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감염되자 본격적인 백신 개발에 나섰다. ‘V3’를 비롯한 백신 프로그램을 속속 개발하다 1995년 주식회사 형태의 ‘안철수컴퓨터바이러스연구소’를 설립했다. 여기까지는 각종 매체를 통해 너무 잘 알려진 이야기들이다. 하지만 부산고 동문들은 “안 의장은 생활습관이 더 신기한 사람”이라고 입을 모은다.

▶(왼쪽부터) 주성도 한국신용정보 부사장, 추호석 파라다이스 사장, 허원준 한화석유화학 사장, 황창규 삼성전자 사장

안 의장은 독서광이다. 제목과 목차, 서문은 물론이고 책의 발행 연월일까지 활자화된 것은 모조리 읽는다고 한다. 책을 너무 좋아해 부산고 시절에는 갖고 다니기 좋고 수업시간에 읽기 쉬운 삼중당문고 400권을 남김없이 읽었다. 일이든 취미든 무엇인가를 시작하기 전에는 반드시 책을 읽는다. 바둑도 어깨너머로 배우기 전에 수십 권의 바둑책을 읽어 외워버렸다. 아마추어 2단 실력이다. 그는 목욕과 이발을 제일 싫어한다. 다른 일을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욕은 집에서만 한다. 목욕 중에 책을 보기 위해서다. 그는 “책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여기에 안 의장은 메모광이다. 그는 술·담배는 전혀 못하고 노래방이나 비디오방에 가본 적도 없다. 운동도 잘하지 못한다. 시간적 여유가 없어 여행도 하지 못한다. 오로지 취미라고는 ‘독서’뿐이다. 메모는 독서에 자연스럽게 따라온 습관이다. 사무실이든 가방 속이든 책 아니면 메모지뿐이다. 안 의장은 “정보를 얻을 때만큼 행복한 순간도 없다”고 말한다. 그의 시간 활용은 가히 초인적일 정도다. 의대 재학 시절 자신의 컴퓨터에 침입한 바이러스를 잡기 위해 백신 개발에 도전한 이후, 그는 ‘의대 공부와 컴퓨터’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전략을 짠다. 안 의장은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전공 공부에서 뒤진다는 말을 듣기 싫어 남들 공부하는 새벽 3시까지는 의학 공부를 하고, 그 이후 3시부터 6시까지 컴퓨터와 씨름했다. 7년 동안 하루 3시간씩밖에 안 잔 셈”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그 결과 그는 박사 학위도 따고 백신 개발에도 성공했다. 지독해 보이는 생활이지만 안철수연구소가 설립된 뒤의 생활에 비하면 그나마 사람에 가까운 시절이었다. 그는 회사를 설립한 후 유학가서는 회사 경영과 공부를 병행하느라 이틀에 한 번밖에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한다. 체력이 좋은 것인지, 초인적 정신력을 지닌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지경이다. 그는 결코 자투리 시간도 놓치는 법이 없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도 그에게는 소중한 재산이다. “우리 회사 건물 엘리베이터는 10분 이상 기다려야 탈 수 있거든요. 그 시간에만 책을 읽어도 한 달에 두 권은 읽어요.”

▶부산고 옛 교정.

김정만 LS산전 부회장은 LS그룹 내 CEO 중 유일하게 오너의 가족이 아닌 사람이다. 그는 원래 자기 병원을 가진 의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의대 진학의 꿈은 여의치 않았다. 무역업을 하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부산고를 졸업하고 3년을 방황하다 결국 그는 부산대 경영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방황했던 3년을 가리켜 ‘인생의 암흑기’라고 말한다.하지만 누구를 만나도 그 시절에 관해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만 그의 지인들로부터 전해들은 그의 학창시절 일화는 김 부회장이 왜 그때를 ‘암흑기’라고 표현하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당시 김 부회장의 가정 형편은 부친이 이발을 할 때가 됐는 데도 집에 돈이 없어 이발소에 가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 머리를 손수 깎아 드려야 했다는 것이 동문들의 말이다. 그럼에도 그가 대학에 갈 수 있었던 것은 다행히 비교적 집안 형편이 넉넉했던 고모가 학비를 대줬기 때문. 당시 김 부회장의 고모는 “대학에 들어갔으니 양복을 입어야 한다”며 양복까지 한 벌 장만해 줬다고 한다. 안철수 의장 고교 시절부터 책 삼매경 어렵사리 진학한 대학 시절 김 부회장은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는 모범생이었다. 한눈팔 수 있는 형편도 아닌 데다 허비한 3년의 세월이 아깝다는 생각에서 공부에 몰두했다. 대학을 졸업하던 1973년 LG화학에 지원했다. “부산에서 가깝고 좋지 않으냐”는 부친의 말에 따른 것이었다. LG화학에 입사한 김 부회장은 자신의 적극적 성격에 맞는 영업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에게 떨어진 일은 재무였다. 스스로 소질이 없다고 여긴 재무 쪽 일을 맡은 뒤로는 이를 악물었다. 서울의 내로라하는 대학을 나온 친구들을 제치고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전문가가 되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세법책을 사다 손에 쥐기 좋게 토막을 냈다. 그러고는 무조건 외우기 시작했다. 세제 관련 법령이 왜 수시로 바뀌는지, 그 배경까지 통달하게 되자 어느덧 재무통이 돼 있었다. 그는 “LG화학에 들어가 부장을 달기까지 10년간 휴가를 한 번도 가지 못했다”고 말했다. 입사 후 10년 만에 부장 직책을 얻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셀 수 없을 정도로 특진을 거듭했던 김 부회장에게는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LG화학 CFO(재무담당 최고경영자·부사장) 시절이던 1999년, LG산전(현 LS산전)의 구조조정을 지휘하라는 그룹의 지시를 받았다. 당시 LG산전은 순차입금만 1조5,456억 원, 부채비율은 무려 1,368%에 달했다. “회사를 정리하려면 대개 스태프를 데리고 오는데, 저는 혼자 왔거든요. 매우 어려웠어요. 사람 습관이라는 것이 무서워요. 변화하기를 싫어하고 안주하기를 원하잖아요? 산전에 온 지 벌써 8년이 넘었는데 지금도 그때 생각이 많이 납니다.” 구조조정하러 온 김 부회장을 LG산전 임직원이 반길 리 없었다. 오랫동안 알고 지낸 임원들마저 그가 부실사업을 정리하는 것을 두고 “설친다”고 했다. 어떤 이는 면전에서 “여기는 LG화학이 아니다. 산전이다”라며 눈을 부릅뜨기도 했단다. 하지만 어떻게든 회사를 살려내야 했다. 2001년 사장이 됐을 때도 어려움은 계속됐다. 영업전략을 바꾸기로 하고 임직원을 설득해야 할 일이 생겼다. 나름대로 기술 관련 공부도 많이 해둔 상태. 하지만 반발이 심했다. 고참 간부들은 등 뒤에서 김 부회장을 비난했다. “돈 만지는 사람이 영업까지 가르치려고 든다”거나 “제품도, 기술도 모르는 사람이 나서는 것을 보니 이제 우리는 망했다”고 푸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이를 악물고 기술 트렌드와 제품 공부에 들어갔다. “사람들은 나무만 보고 숲은 못 봐요. 우리는 독점이니 일본에서 기술만 들여와 물건을 만들어 팔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하면 궁극적으로 기업경쟁력이 떨어집니다. 앉아서 영업하는 것은 영업이 아니죠. 대리점 사장 30년 해봤자 소용 없어요. 그래서 ‘이제는 앉아서 하는 영업은 집어치워라. 고객을 찾아다니면서 팔아야 한다’고 했죠.” 김정만 부회장 고교 졸업 후 3년간 방황 그로부터 3년쯤 지나자 조직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했다. 임직원들도 김 부회장의 뜻이 옳다는 것을 알고 적극적으로 시장을 개척하고 나섰다. 김 부회장은 업무 처리에서 깐깐하기 짝이 없다. 전자 태그(RFID) 신사업팀을 꾸렸을 때의 일이다. 직원이 올린 사업계획서를 “부족하다”며 돌려보낸 것이 28번. 결국 29번 만에 ‘OK’를 해줬다. “문제가 되는 것을 그냥 못 둡니다. 항상 바꾸라고 이야기하니 직원들은 굉장히 고달프지요.” 1980년대 학습지시장에 돌풍을 일으키며 사교육시장을 석권한 박성훈 재능그룹 회장은 아이디어 하나로 평범한 월급쟁이에서 교육그룹의 오너 자리에 오른 부산고 동문이다. 현재 재능그룹은 재능방송·English TV 등 10여 개 계열사를 거느리는 국내 굴지의 교육그룹으로 성장해 있다. 또 미국 등 5개국에 9개 지사를 두고 해외 교육시장에도 진출했다. 사회 초년병 시절 박 회장은 ‘교육’과는 무관한 사람이었다. 부산고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경영학 석사(MBA)를 받은 뒤 귀국해 1970년대 초반 효성그룹의 동양나일론에 입사했다. 촉망받는 대기업 직원이었던 그는 입사 4년 만에 샐러리맨 생활을 접었다. 당시 부산에서 무역과 운수업을 하던 부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가업을 잇기보다 새로운 사업을 구상했다. 그것이 바로 1977년 5월 돛을 올린 재능교육이다. 획일화된 교육제도와 주입식 교육 현실, 그리고 구몬(공문) 등 일본계 학습지의 시장 잠식을 안타까워하며 그는 프로그램식 학습체계와 목표, 과학적 평가 시스템이 연결된 ‘스스로 학습법’을 개발했다. 초기에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교육사업을 하겠다고 하자 주위에서 다 놀라더군요. 학습 시스템을 개발했지만 매출이 없자 집을 팔고 사채를 끌어쓰다 보니 이내 빚더미에 올랐어요. 당시에는 ‘정말 빚만 없다면 리어카를 끌어도 행복하겠다’는 생각을 수없이 했죠.” 지성이면 감천이라고나 할까? 집요한 연구와 노력 끝에 1987년 중학 3학년용 수학교재가 시판되고 나서 상황이 달라졌다. 이어 박 회장은 1992년 미국 LA 현지법인 설립 후 2003년 중국 현지법인도 세웠다. 그의 경영철학은 ‘포장마차 경영’이다. “직원과 함께 포장마차에 종종 갑니다. 그러고는 그들에게 ‘2류가 모여 1류를 만들자’고 말하죠.” 이런 노력 덕택에 직원 27명으로 출발한 재능교육은 현재 직원 1,700명, 학습지 교사 6,500명에 연 4,500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로 성장했다. 홈쇼핑업계 1위 탈환을 위해 절치부심하는 임영학 CJ홈쇼핑 대표는 삼성그룹 공채 출신이다. 그룹 비서실과 삼성물산에서 오랜 기간을 보냈다. 삼성물산 시절에는 e커머스와 e전략을 담당하면서 삼성물산에 e비즈니스를 도입했다. 이후 삼성물산의 e비즈니스 사업은 기대만큼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지만, 임 대표는 어쨌든 이로 인해 2001년 <비즈니스위크>지 선정 ‘아시아 스타 리더 50인’에 꼽히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당시 <비즈니스위크>는 임 대표가 “삼성물산을 철강·화학·수산물 분야 전자상거래시장의 세계적 선도기업으로 끌어올렸다”고 평했다. ‘아시아 스타 리더 50인’ 임영학 대표 임 대표가 CJ홈쇼핑에 부임한 것은 2002년. TV홈쇼핑부문에 직접 관여하기 시작한 때는 2003년 말 TV홈쇼핑부문 총책임자인 영업1본부장을 맡으면서부터다. 영업1본부장이 된 후 그가 가장 먼저 추진한 일은 ‘방송편성표 공개’. 당시만 해도 편성표를 공개한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던 일. 혹시라도 방송 스케줄이 경쟁사에 노출될까봐 전전긍긍하는 분위기가 일반적이었던 탓이다. 임 대표는 충동구매가 만연한 홈쇼핑문화를 바꾸기 위해서는 편성표 공개가 필수적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경쟁사가 같은 시간에 같은 상품을 방송하는 등 맞불작전을 펴면 매출액이 크게 줄어들 것이라는 경고도 나왔지만, 임 대표는 끝내 주장을 관철했다.

예상 외로 CJ홈쇼핑은 오히려 투명 이미지를 얻게 됐고, 이후 경쟁사들도 앞 다퉈 편성표를 공개하기 시작했다. TV홈쇼핑은 물론 CJ몰까지 총괄하는 영업본부장이 된 후에는 ‘상품확대경’ 제도를 시작했다. 상품의 장점뿐 아니라 단점까지 자막으로 보여 주는 것. 이 또한 CJ홈쇼핑의 지지층을 늘리는 기폭제가 됐다. 대표이사가 되면서는 ‘경품‘이라는 단어를 아예 없애버렸다. 현재 CJ홈쇼핑에는 경품이 일절 없다. MD·PD들의 반대에도 충동구매가 일어나는 가장 큰 이유인 데다 취소·반품을 늘리는 주범인 경품을 없애겠다는 임 대표의 생각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 관철됐다. “경품은 없어졌지만 경품 가격만큼 거품을 뺐다”는 코멘트는 오히려 소비자들에게 신뢰를 얻었고, 덕분에 CJ홈쇼핑은 ‘가장 믿을 만한 홈쇼핑’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게 됐다. 관가에서는 요즘 부산고 출신의 이름이 자주 눈에 띈다. 그중에서도 주목받는 인물은 얼마 전 주택공사 사장에 오른 박세흠 전 대우건설 사장. 박 사장은 지난 지방선거 때 열린우리당 후보로 제주도지사선거에 출마했다 낙선한 진철훈 전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 이사장과 막판까지 경합한 끝에 주택공사 사장 자리를 꿰찼다. 박 사장은 1976년 대우건설에 입사해 대표이사까지 지낸 정통 ‘건설맨’이다. 박 사장의 지상과제는 ‘임대주택을 포함한 주택 공급’이다. 울산에서 태어난 박 사장은 부산고와 서울대를 졸업해 범부산 인맥으로 꼽힌다. 박 사장은 2006년 대우건설 CEO 시절 회사 창립 33년 만에 시공능력평가 1위(지난해 매출 5조7,291억 원, 영업이익 6,288억 원)에 올려놓았을 정도로 능력도 인정받고 있다. 다만 권해옥·김진 등 전임 사장들은 수뢰로 아예 구속됐고, 한행수 전 사장도 사실상 불명예 퇴진해 ‘블랙홀’로 불리는 주공 사장 자리를 박 사장이 명예롭게 마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박 사장의 전임자인 한행수 전 주공 사장은 노 대통령의 부산상고 선배로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웠지만 돌연 사표를 제출하고 즉각 수리돼 관심을 모았다. 박세흠 사장은 변양균 청와대 정책실장, 김창록 산업은행 총재 등과 부산고 동기다.

부산고는 어떤 학교

“지방 고교 중 CEO 최다 배출… 현재 학교 이전 논란 중”

1913년 부산공립중학교로 개교해 1950년 부산고등학교로 개편한 오랜 역사와 전통을 갖고 있다. 고교 평준화 이전까지 부산에서 가장 학력이 우수한 학교로 우리 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수많은 인사를 배출했고, 지금도 그 전통을 면면히 계승하고 있는 전국적 명문이다. 또한 전국 규모 고교 야구대회 최다 우승 기록(총 25승)을 보유하고 있기도 하다. 지난해 한 경영 전문지 조사에서는 국내 500대 기업 대표이사 524명 중 25명이 부산고 출신인 것으로 집계돼, 지방 소재 고등학교 중에서는 가장 많은 대기업 CEO를 배출한 학교로 선정되기도 했다. 부산고는 요즘 교사 이전 문제를 놓고 고민에 빠져 있다. 부산시 동구 초량동에 자리 잡은 현재의 교사를 신도시인 해운대구 재송동 센텀시티로 이전을 추진하고 있지만 동구 지역 주민들이 이전에 반대하는 것. 부산고는 학교를 옮긴 뒤 이름도 센텀고(가칭)로 바꿀 것도 구상 중이다. 부산고가 학교를 옮기기로 한 것은 한때 600명이 넘던 신입생이 지난해 300명 미만으로 줄어드는 등 학교 운영에 어려움을 겪기 때문이다. 새로운 부산고는 내년 3월 개교를 목표로 건립이 추진되고 있지만 이 속도라면 내년 개교를 장담하기 힘들 전망이다. 정일환_월간중앙 기자[whan1@joongang.co.kr] <월간중앙 7월호> 매거진 기사 더 많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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