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영씨의 꿈(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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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작가 황석영씨는 지난 84년 10년에 걸친 신문연재소설 『장길산』을 탈고하며 이런 말을 했다. 『나의 바람은 저자거리에서 하나의 이름없는 광대의 몸짓으로 이름없는 수많은 광대들의 삶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그 광대패거리속에서 자라 의적이 된 역사적 실존인물 장길산을 오늘의 역사에 접목시키려 심혈을 기울였던 황석영씨를 문단에서는 「황길산」이라 부른다. 한때는 그의 생활자체가 뜬 구름같은 「광대」였고,또 불의를 보고는 못참는 「의적」 같았기 때문이다.
황씨의 소설에는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고달픈 고향을 등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나같이 성공의 꿈을 안고 대처인 서울로,서울로 몰려든다. 그러나 도시의 각박한 생활양식과 상황은 그들의 꿈을 무참하게 짓밟는다. 좋은 직장을 꿈꾸고 상경했다가 술집의 작부로 전락하는 『삼포가는 길』의 주인공이나 레슬러의 꿈을 키우다가 목욕탕 때밀이로 취업하는 『장사의 꿈』의 주인공 등이 모두 그런 부류들이다.
이처럼 산업사회의 변화과정에서 빚어지는 도시와 농촌의 명암을 노동계층의 소외된 삶속에서 찾으려 했던 「민중작가」 황씨가 「분단작가」로 변신한 것은 지난 89년3월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있는 자신의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다가 북경을 경유,밀입북한 것이다.
그는 북한체재기간중 「영웅」대접을 받으며 김일성주석도 만났고 벤츠를 타고 여행도 했다. 그 여행중에는 『장길산』의 무대였던 구월산도 포함돼 있었다. 그래서 당시 문단에서는 「자신이 무슨 장길산이나 되는 것처럼 실정법을 무시하고 그렇게 분단의 벽을 훌쩍 뛰어 넘는 것은 소영웅주의」라는 비판이 있었는가 하면,「누군가가 먼저 넘어야 할 벽을 넘은 분단시대의 작가다운 용기」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노구의 문익환목사도,어린 임수경양도 구속될 것을 알고 돌아온 남녘땅에 돌아오지 않고 4년여의 세월을 이국에서 헤맸다. 그것은 진정한 용기라 할수는 없다.
하지만 그는 오랜 방황끝에서 다시 「모국어의 품」에 안겼다. 법의 심판이 남았지만 우리는 모두 앞으로 그가 더 좋은 「분단문학」을 쓰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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