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NANCIAL TIMES 레일라 불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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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러시아는 지금 통치불능 상태에 빠져 있다. 나라 전체가 무기력과 무정부상태에 빠져있는 속에서 정부와 의회는 개혁의 방향·방법을 놓고 싸움만 벌이고 있다.
보리스 옐친대통렁령 보리스 표도로프 부총리겸 재무장관이 주도하고 있는 개혁에 판돈을 걸고 있는 서방 지도자들은 25일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옐친진영이 승리를 거둬 개혁이 현재의 정체상태에서 벗어나 진전하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국민투표에서의 승리가 결코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두가지 근본적인 장애가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우선 서방의 지원이 개혁이 진전되는데 실질적으로 기여할 수 있도록 각부문에 제대로 전달되게 하는 「효과적 시스템」을 만드는 문제가 있다.
또 하나는 러시아의 개혁수행 능력을 제고하는 문제다. 러시아는 자신 스스로에 필요한 것을 파악하는데 서방보다 유리한 입장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최근 모스크바의 한 저녁식사 모임에서 러시아의 젊은 정치인 그룹은 서방이 왜 지난해 이맘때쯤 러시아에서 무엇이 어떻게 잘못되고 있는가를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성토했다.
이들의 문제제기는 서방이 모든 문제를 잘 알고 있으리라는 순진한 믿음을 전제로 한 것이지만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짚은 것이다. 서방은 러시아가 어디서 어떻게 개혁을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해 합의된 견해를 전혀 갖지 못했음을 비판한 것이다.
러시아 정부는 아직도 광범위한 비능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표도로프부총리는 최근 세수가 징수목표의 60%에 불과하다고 밝힌바 있다. 최근 경제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안드레이 네차예프도 같은 견해를 표시했다. 그는 대표적인 비효율의 사례로 내각의 업무가 대통령 안전보장회의와 같은 기구의 업무와 중복되며, 심지어 이 기구가 내각보다 우위에 서는 경우마저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무엇보다도 일관성 있는 정책결정이나 이 나라의통 합에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는 것은 여러 지역. 각종 기업에 대한특혜와 연방세 면제조치들일 것이다. 옐친대통령 자신도 인정했듯이 「지방행정단위로 가면 뇌물을 주는 사람만이 가장 큰 목소리를 낼수 있도록」 각종 특혜가 인정되고 있다. 최근 러시아를 방문한 자크아탈리 유럽부흥개발은행(EBRD)총재는 『우리는 러시아인들에게 구체제를 해체하라고 충고했으나 그들에겐 해체되고 난 빈자리를 채울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현재 러시아가 처한 문제를 아주 적절하게 표현했다.
역사학자 로버트 콩퀘스트는 1921년 소련 농민들이 기아에 빠졌을 때 서방이 제공한 원조가 어떤 결과로 이어졌는지에 대해 역설적인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1926년판 소련백과사전은 미국에서 온 구호요원들이 최대 1천만명이 굶어 죽는 것을 막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후에 간행된 백과사전은 서방구호요원들이 혁명을 가로막고 사보타주하기 위해 파견한 첨병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앞으로 러시아가 다시 쇄국정책을 취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서방이 러시아인들의 개혁에 채찍을 가할 수 있는 몽둥이를 만들어 줄 능력이 없다면, 서방의 영향력은 쇠퇴할 것이 분명하다. 서방이 러시아라는 진창에 빠져들고 싶어하지 않는 데는 나름대로 정당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서방은 진창에 빠져들어야 한다. 그것은 러시아가 서방의 포용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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