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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천여종 수목에 전세계 목련 가득|미군정청·한국은행근무 79년 귀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서해안 바닷가 외진 곳에 동양최대의 수목원 (충남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을 가꾸는 「나무할아버지」민병갈씨 (72· 본명 칼밀러). 그는 다시 태어난 나라 한국에서 어느 한국인보다 진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지난 79년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주민등록증을 발급 받아 미국인에서 한국인으로 귀화한 그는 주중엔 주식시장의 양세를 좇는 쌍용투자증권의 고문으로, 주말에는 풍광이 뛰어난 천리포 바닷가 21만평의 언덕에 나무와 꽃과 풀의 낙원을 가꾸는「천리포 수목원 할아버지」로 돌아간다.
지난 45년 한국에 첫발을 내디딘 후 48년간을 한국에 살아온 그가 30여년간의 열정을 쏟아부어 이룩한 이 수목원에는 아시아 어느 국가의 수목원도 따라갈 수 없는 7천여종의 수종 자생종 국자생종 개량종)들이 저마다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이루고 있다. 현재 대한식물도감 등에 수록된 우리나라 초목 본은 모두 4천3백여종.
천리포수목원에는 이보다 2천7백여종이나 많은 수종이 보관돼 있어 이곳에는 1년내내 이를 보고 공부하려는 전국의 학생, 교수 및 외국의 식물학자 1만여명이 줄을 이어 「수목학습장」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세계곳곳의 목련이 거의 수집돼 있어 목련왕국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에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노란색목련, 2O년이 다 돼야 꽃을 피우는 히말라야목련 등 4백50여종이 때마침 4월을 맞아 화사한 아름다움을 뽐내 보는 이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또 각양각색의 잎새를 자랑하는 호랑가시나무가 4백여종이나 되며 월귤·개가시나무·팥꽃나무·섬회나무 등 이곳에서만 볼 수 있다는 희귀종도 3천여종에 달한다고 했다.
정부나 사회단체에서도 이끌어가기 힘든 거대한 수목원사업을 이곳 사정에 어두웠던 한 벽안의 외국인이 시작한 것은 60년대 초반.
미국 펜실베이니아 피스톤출신으로 그곳의 버크넬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미해군 정보부 위탁교육생으로 콜로라도 대학원에서 일본어를 전공한 그는 일본근무를 거쳐 한국이 일제에서 해방된 직후인 45년 9월 해군정보대의 일원으로 한국근무를 시작했다. 한국에 배치된 것도 한국파견을 싫어한 한 동료를 대신해 한국근무를 자원했던 것.
구후 미 군정청· 유엔민사원조단 등에서 근무했고 52년부터는 한국은행 조사부에서 82년까지 30년간을 일했다.
이곳에서 그가 한 일은 경제동향이나 관련자료 등을 영어로 엮어 영문판 「통계월보」 발행을 돕는 일이었다. 여기서 쌓은 지식과 미국에서 젊어서부터 증권투자를 해온 경험 등을 밑전으로 86년까지 한양투자증권의 고문으로 일할 수 있게 됐다.
70대의 노인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건강이 좋아 보이는 그가 86년부터 현재까지 하는 일은 쌍용투자증권의 단골고객 등을 위해 투자상담을 해주는 일이다. 나무와 풀과는 거리가 먼 듯이 보이는 그가 난데없이 아시아 최고의 수목원을 하게 된 것은 60년대 초반 당시로서는 상당히 벽초하였던 천리포를 우연치 여행하면서 비롯됐다.
이곳의 절경에 반해 자주 찾아간 그에게 마침 형편이 어려웠던 마을의 노인이 땅을 사줄 것을 요청하면서부터. 황량한 모래밭을 쳐다보면서 마음이 내키지 않았었다는 그는 그러나 평소 자신이 좋아했던 나무들을 길러 이 땅을 푸르게 가꾸어보자는 결심을 하게 됐다는 것이다.
62년 초 당시 돈으로 평당 7백환을 주고 1천여평을 사 하나 둘 나무를 심기 시작했던 그는 차츰 이 땅에서 사라져 가는 자생식물 등을 보존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수목원용으로 근처의 땅을 사 모으기 시작, 현재는 21만평에 이르게 됐다는 것.
수목원을 국제적 규모로 키워나가면서 그는 미국에 있는 어머니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79년 한국인 국적을 취득했다. 이 사업이 자신 당대에 이룰 사업이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그가 수집한 수종은 대부분 30여개국 2백여 수목원들과의 교류에서 얻어진 것이고 필요한 것은 현지에서 구입해 갖추었다. 그는 북한을 제외하고는 천리포수목원의 묘목이나 씨앗이 나가있지 않은 나라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는 씨앗을 채집하고 묘목을 구하기 위해 1년에 10여회 정도 여행을 떠나는 생활을 해왔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은 「개발」이라는 단어다. 한국에서 개발이라는 미명아래 자연이 얼마나 훼손됐는지 개탄할 정도다. 이제「보존」에 정말 신경을 써야 할 때』라고 늘 입버릇처럼 말해 온 그는 이를 실천하 듯 자신의 수목원에서 일체의 농약사용이나 전지 등을 금하고 있다. 자연을 자연 그대로 살리자는 것이 그의 최대 목표.
이 탓에 그의 수목원은 개똥벌레· 개구리· 다람쥐와 각종 새들의 전국이기도 한데 이름 모를 꽃과 새소리가 반가운 수목원의 오솔길을 걷다보면 그가 한국전통가옥을 보존하자는 생각에서 서울 등지에서 옮겨다 놓은 기와집 5채와 초가집들도 만나게 된다.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모두 11명. 이곳은 그가 경제적 지원을 하다 양자로 삼은 송진수씨가 총관리를 하고 있다. 수목원 일부와 그의 서울 연희동 집은 모두 명의가 그의 양자이름으로 돼 있다고. 그는 또 그의 수목원에서 일하는 영리한 젊은이 둘을 미국과 영국 등지에 유학을 보내기도 했다.
현재 세계 목련학회 이사이며 영국왕실 아시아연구학회 임원이기도 한 그는 산림청 산하 재단법인으로 돼 있는 수목원을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공익법인으로 만드는 작업을 추진중이다.
영국· 미국 등에서 수목에 관련된 책을 구해 독학으로 「나무박사」가 된 그는 앞으로 이곳에 그가 만들고 있는 나무족보, 수목관련서적 등을 볼 수 있는 수목도서관을 설립할 걔획이라고 했다. 넓은 수목원의 땅값을 따져보려는 사람들을 만날 때 당혹스럽다는 그는 『땅만 보면 투기대상으로 떠올리는 한국사람들의 버릇은 불행한 것』이라고 했다. <고혜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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