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치·법치(분수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천안문사태이후 프랑스로 망명한 엄가기라는 중국의 정치학자는 권력형태를 8개로 분류했다. 1급 권력은 정신과 세속권력을 동시에 장악하는 신권군주로 로마시대의 교황이나 이슬람의 술탄이 여기에 속한다. 2급 권력은 전제군주제하의 국왕으로 종신 최고권력을 장악한다. 대표적 전제군주라면 중국의 진시황,프랑스의 루이14세가 꼽힌다. 3급 권력이란 이원군주제하의 군주로 독일의 빌헬름1세나 일본의 명치·대정 등 국왕이 여기에 속한다.
현대식 민주제하의 대통령을 그는 4급권력으로 분류했고 5급은 일본식 총리,6급은 쌍두원수제하의 행정수뇌,7급은 프랑스식 총리,8급은 허위적 국가원수로서 영국의 국왕이나 독일의 대통령이 여기에 속한다고 했다.
정치권력으로서의 앞의 세가지 권력형태는 세습적이고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권력자의 힘을 자랑할 수 있었다. 「짐이 곧 국가」여서 그의 말 한마디가 곧 법이고 제도였던 것이다. 이런게 바로 인치국가다. 법과 제도를 넘어 군주의 뜻과 의지에 따라 법과 제도가 바뀔 수 있는 전근대적 정치행태가 인치일 것이다.
이에 비해 4급이하 권력은 정해진 법과 제도에 따라 국가가 운영되는 법치다. 권력자의 인격이나 품성에 따라 좌지우지되지 않고 정해진 룰에 따라 무리없이 집행되는 권력형태라 할 수 있다. 권력자의 취미나 개인적 성향에 따라 국가의 법운용이나 질서가 무너지고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법의 테두리 속에서 집행되고 법과 제도에 흠이 있다면 정해진 절차에 따라 이를 고쳐나가는 것이 법치다. 며칠전 일본 매일신문의 한국 특파원이 「한국은 대통령이 다스리는 인치국가이지 법치국가는 아니다」는 기사를 실었고 민자당 대표가 이를 인용하면서 요즘 개혁파동에 대해 뭔가 회의를 느끼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문민시대의 민주화 개혁을 인치로 비꼰 일본 언론의 자세는 물론 가당치 않다. 그러나 개혁주도세력도 개혁을 걱정하는 사람들을 개혁저항세력으로 매도만 할 것이 아니라 그동안 법치가 아닌 인치의 무리수는 없었는지,개혁의 바람몰이에만 급급해 개혁의 방향과 본질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루 점검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