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의 현장에서 맘껏 취하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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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 17면

뉴시스

나는 운이 좋게도 대학에 갓 들어간 딸과 함께 20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축구팀 초청경기를 볼 수 있었다. 사실 우리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여자 대학생이 아빠와 외국 축구팀의 초청경기를 관전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일이었다. 요즈음과 같이 세대 간에 그리고 성별 간에 공통점을 찾기가 힘들어져 가는 다양화의 시대에 딸과 함께 공통의 관심사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축구 경기가 주는 축복이다.

경기 전 행사들을 보기 위해 좀 일찍 경기장으로 향하는 전철을 탔는데도 벌써 초등학생 아들과 함께 경기장으로 가는 아빠들과 이성친구와 함께 빨간 셔츠를 입고 경기장으로 향하는 사람들, 그리고 친구들과 왁자지껄 떠들어대며 경기장으로 가고 있는 젊은 사람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이제 축구경기는 파편화되어 가는 현대사회의 개인화를 막아주는 매력적인 통로가 되어 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불현듯 우리나라가 2002년 한·일 월드컵축구대회를 준비하고 있을 당시 신문에 프랑스의 한 외교관이 기고한 기사가 생각났다. 그는 한국 사람들의 축구응원 열기가 그가 아는 여러 나라의 축구응원과 매우 다르다고 얘기하였다. 그중에서 늦은 밤이든 새벽이든 한국 대표팀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아파트의 불이 모두 켜지고,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집이 떠나가라고 응원하는 모습을 가장 독특하고 인상적이라고 적고 있었다.

중앙포토

그러면서도 그는 응원하는 사람들이 축구장에서 실제로 축구를 하거나 또는 대표팀의 경기가 아닌 축구경기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이 매우 이상하게 보인다는 의견을 적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국가 간의 스포츠 경기에 유별나게 강한 민족주의적 애국심을 나타내왔다. 이는 근대 스포츠가 일본의 식민지배 시대에 우리나라에 도입되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이번 초청경기는 한국의 대표팀 경기가 아니기 때문에 민족주의적 차원이 아닌 측면에서 국민들이 축구에 열광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이 나를 설레게 했다.

연합뉴스

FC서울이 한국 최고 수준의 프로축구팀이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팀은 세계 최고 수준의 프로축구팀이기 때문에 이들의 경기에 열광할 이유는 충분한 것이다. 우리나라 박지성 선수가 주전 선수로 뛰고 있는 팀이라는 자부심도 관심을 높이는 큰 이유다. 선수들의 몸값을 합치면 1조원의 절반에 육박한다는 세계적인 축구스타들의 팀과 벌이는 경기라는 점에서도 열광할 이유가 충분한 것이다.

실제로 경기장의 한쪽에서는 FC서울의 서포터스가, 다른 쪽에서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서포터스가 경기장을 축제의 분위기로 몰아넣고 있었다.

경기 시작 20여 분 만에 FC서울이 0-3으로 밀리자 내 딸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팀이 6-0으로 이길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실제로 우리 FC서울에는 너무도 힘든 골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팀에서는 너무 쉽게 만들어지는 것을 보았다. 체육을 전공한 나는 한국 최고의 선수들이 보여주는 경기력의 격차 때문에 슬픔에 잠기고 있었다. 그러나 딸은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보여주는 스피드와 기술의 아름다움에 탄성을 지르며 그 경이로움을 마냥 즐기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후기산업사회의 이론에 따르면 1차산업이 주도하는 전산업사회에서 스포츠는 노동력을 축내는 한갓 사치일 뿐이다. 제조업이 주도하는 산업사회에서 스포츠는 일을 더 잘하도록 힘을 재생시키는 레크리에이션 활동이 된다. 그러나 현대사회와 같은 후기산업사회에 이르면 스포츠활동을 통해 얻는 즐거움과 건강 자체가 일과 같이 소중해지는 시대가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의 축구경기는 돈을 벌지 않는 곳에 에너지를 쓸 수 있다는 것을 남에게 보이려는 사치와 과시를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다른 나라를 이겨야만 즐거울 수 있는 편협한 민족주의적 애국심도 넘어서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축구경기는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펼치는 경이로운 경기기술과 전술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즐기고 성원하는 축제의 장으로 승화되고 있음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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