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두 장의 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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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두 장의 혀’ - 김혜순(1955- )

세상을 다 삼킬 수는 있어도

이것만은 삼킬 수 없는 것

그러나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

나의 혀

오늘 밤 우리는 어둠 속에서

두 장의 혀를 맞대었다

몸속의 검은 달

내 혀가 풍선껌처럼 부풀었다

월식하는 중이었다

검은 달 속에서 밤에만 눈뜨는

올빼미들이 울었다

술병을 앞에 놓고 앉아 각자의 혀로

공중에다 온갖 글자를 다 찍어댔지만

정작 자신 속엔 아무 글자도 저장하지 않는 모니터

우리는 각자의 모니터를 맞대었다

긴 혀로 너의 젖을 다 빨아먹고 뇌도 핥아먹어야지

두 장의 혀는 죽음처럼

오늘 밤이 새도록 칭얼거리고

우리는 몸도 없이

혀만 낼름거렸다


육체는 사라지고 이 혀만 남는다? 두 혀가 맞댄 채 시간의 틈을 막는 이 기이한 미끄러움은 숨막히는 찰나다. 풍선처럼 부푸는 달과 올빼미 소리는 상극이며 그러므로 희열이다. 이곳에서 모든 억압과 구조는 사라진다. 정밀한 전위성. 절대 삼킬 수 없는 혀. 이 혀 속에 모든 것이 와 있다. 영혼은 증발하고 밤새 혀만 칭얼거린다. <고형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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