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레터] 그래도 살 맛 나는 책세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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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쌀독에서 인심 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배가 불러야 예의며 염치를 따진다고도 하죠.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모양입니다.

 16일 커뮤니케이션북스(대표 박영률)에서 보내온 e-메일을 받았습니다. 1월 25일 출간한 『동굴벽화에서 만화까지』(랜슬롯 호그벤 지음, 김지운 옮김)를 리콜한다더군요. 책이나 영수증을 서점으로 가져오면 수정본으로 교환해 준다며 독자들에게 이를 널리 알려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조금 의아했습니다. 쉬 읽히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는 책이라 판단해 서평을 소개했던 책이거든요.(본보 2월 10일자 23면 참조) 영국계 언어· 유전학자의 저서로 인류가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지구상의 유일한 종(種)이라는 데 착안해서, 문명사를 커뮤니케이션이란 키워드로 분석한 내용이었습니다. 출판사 측이 인류학· 고고학· 정치학· 경제학 지식을 동원한, 커뮤니케이션 분야의 고전이라 자랑할 정도였죠.

 배경을 알아보니 편집상의 사소한(?) 실수 탓이었습니다. 번역본을 만들며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커뮤니케이션사 연대기 개황’을 앞에 붙였는데 이게 말썽이었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편집과정에서 원고의 3분의 1이 빠져 14쪽만 실렸답니다.

 박 대표는 “책이 나온 지 두 달 뒤부터 독자들의 지적이 들어왔다”며 “전문연구자들이 두고 두고 볼 책인데 제대로 만들어야겠다 싶어 아예 책을 바꿔주기로 했다”고 사정을 밝히더군요. 그러면서 이 참에 몇몇 오탈자도 바로잡고 처음 번역판에서 일부 빠졌던 대목을 새로 넣어 수정본은 24쪽이 늘어났답니다.

 초판을 1000부 찍어 80% 정도가 팔렸다니 리콜하자면 제작비며 물류비 해서 약 2000만원의 손해를 감수해야 합니다. 직원이 20여 명, 연매출 40억원 정도인, 크지 않은 출판사로선 쉽지 않은 결정이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재판(再版)을 낼 때 고치지 리콜할 것까지야…’싶으면서 오탈자는 물론 오역(誤譯)에 비문(非文)이 수두룩한 책을 지적해줘도 막무가내로 버티는 몇몇 유명 출판사들이 행태가 떠올라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이런 우직한 출판인들이 우리 출판문화의 버팀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말입니다.  

김성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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