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은논술의힘] 존 스튜어트 밀의 '여성의 종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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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으로 유명한 영국 자유주의 사상가 존 스튜어트 밀(1806~73)은 『여성의 종속』을 통해 현대 페미니즘의 대표적 인물로 떠올랐다. 그는 이 책에서 남녀불평등으로 인해 빚어지는 ‘온갖 종류의 비참하고 가증스러운 일’ 에 대해 격정적으로 성토하고 있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인류의 절반이나 되는 사람들이 지금처럼 고통을 겪으며 살아야만 할 이유가 있기는 한가?

 밀의 대답은 ‘아니다’이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그 어떤 본질적인 차이도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일부 사소한 차이가 눈에 띄지만, 교육과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남성지배체제가 만들어낸 인위적 산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남성우월주의자들은 흔히 철학과 과학 또는 예술 방면에서 정상급의 작품을 남긴 여성이 없다면서, 이것을 ‘여성이 남성보다 분명히 모자라는’ 증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밀의 생각은 다르다. 여성이 자질구레한 일들에서 벗어나 그런 방면에 집중할 수만 있다면 대다수 평범한 남성보다 훨씬 더 대단한 창조적 능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치나 행정면에서도 여성이 남성보다 못할 이유가 없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몇몇 여왕은 최고 통치자의 능력이라는 측면에서 남성보다 뛰어난 업적을 남기지 않았는가? 그는 이런 논거에서 여성에게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투표권을 부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시대를 100년이나 앞서간 발상이었다.

 

결국 여성이 지금처럼 비인간적 억압 구조 속에서 신음하며 살아야만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게 밀의 주장이다. 그는 남녀불평등이 궁극적으로 남성 자신에게도 큰 피해를 준다는 점을 날카롭게 입증한다. 우선 정당하지 못한 지배권력에 도취되면 인격파탄이 되면서 남성의 삶 전체가 심각하게 왜곡되고 만다.

 여성을 옭아매는 종속의 사슬이 끊어지지 않으면 부부생활도 불행해진다. 남편과 아내 모두 ‘높은 수준의 능력과 소질’을 비슷하게 갖추고 상대방에 대해 일정 정도 비교 우위를 지녀야 한다. 그래야 서로를 바라보며 한편으로 지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도받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그럴듯한 모양으로 포장해도 야만적 삶의 잔재에 불과하다. 아내가 지적으로 너무 떨어지면 남편에게 ‘영원히 무거운 짐과 같은 존재, 심지어 방해하는 존재’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여성이 해방돼야 이런 족쇄가 사라지는 것이다.

 『여성의 종속』은 자유, 효용, 인간 본성, 사회 등에 관한 그의 철학 전반을 포괄하고 있어 ‘존 스튜어트 밀의 종합판’이라는 평을 듣기도 한다. 이 책이 페미니즘에 관한 최고의 고전으로 자리를 굳힌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가 남녀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던 시대 풍조를 거슬러 가며 자신의 신념을 당당하고 용기있게 펼치는 모습은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귀감이 된다.

 

서병훈 교수 (숭실대·정치외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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