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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후계자 *상(5)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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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김정일은 73년 9월에 열린 당중앙위 제5기 7차 전원회의에서 조직사상비서로 발탁됐다. 이 자리는 후계자로 가는 징검다리였다.
전 북한고위관리는 이 회의에 앞서 5월초 정치위원회 확대회의에서 그 같은 결정이 내려졌다고 전한다. 7차 전원회의가 9월에 열린 것은 그해2월에 발동된 3대혁명소조운동에서 나타난 갖가지 편향과 폐단을 수습하는 일이 급해졌기 때문이었다.. ·
3대혁명은 새 세대 청년들에게 「혁명의 대를 잇게 한다·는 취지를 담고 있어 소조운동은 후계체제의 발동을 위한「준비체조」였다.
3대혁명소조가 주요 공장·기업소· 협동농장에 파견되면서 배한 전역은 일대 소용돌이에 빠져들었다. 처음 예상과는 달리 곳곳에서 부작용이 터져 나왔다. 갓 대학을 나온 20대소조원들의 전횡과 월권으로 기존 관료들의 불만의 소리가 높았던 것이다. 이 운동을 김정일이 주도하도록 한만큼 사태수습이 급했다. 하루빨리 당 중앙위 전원회의를 열어야 할 형편이었던 것이다.

<혁명소조운동 주도>
전 북한고위관리는 7차 전원회의 직전인 8월30일의 정치위원회 확대회의에서 3대혁명운동 수행상황, 김정일의 당비서 확정이 의제로 다뤄졌다고 증언한다. 이날은 북측이 김대중납치사건을 이유로 남북조절위원회 명의로 발표되었다 (김영주는 74년 2월 정무원부총리로 자리를 옮겼고75년 중반부터 자취를 감추었다).
관심을 끄는 것은 남북대화가 전면 중단된 바로 그 시점에 김정일이 삼촌 김영주로부터 당의 조직사업 전권을 인계 받은 사실이다.
9월4일에 열린 당 중앙위 제5기 7차 전원회의는 17일까지 계속됐다.
3대혁명운동의 수행상황에 관한 복잡한 문제가 많았던 데다가 「대안의 사업체계」 ( 62년부터 실시된 경제 각 부문에서의 당적지도 강화와 집단주의정신이 강조된 공업관리 형태)에 알맞은 독립채산제 실시문제도 의제였고, 더욱이 김정일의 당비서 확정문제를 다뤘기 때문이다.
당 중앙위 전원회의의 토의과정은 관례대로 비밀이다. 나중에 의제 및 결론 일부만 『노동신문』 등에 발표한다. 7차 전원회의가 끝난 뒤 3대혁명운동수행상황문제, 「대안의 사업체계」 에 맞는 독립채산제 실시문제는 보도됐다. 그러나 김정일이 조직사상비서로 선출된 사실은 비밀에 부쳐졌다

<"대 잇기"발판 마련
노동당에서 조직사업과 선전· 선동사업을 한사람에게 맡긴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무소불위의 당권을 김정일에게 넘겨 후계자 지위를 굳혀갈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줬다.
31세 청년이 노동당 핵심업무를 요리하는 사태가 온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의부에선 베일에 싸인 노동당 내부동향을 알아챌 길이 없었다 .
전 북한고위관리에 따르면 후계자 확정까지는 74년 2월의 당 중앙위 제5기 8차 전원회의, 74년 10월의 9차 전원회의, 그리고 75년 2월의 10차 전원회의를 남겨놓고 있었다고 한다.
우선 김정일은 74년 2월 11∼13일의 8차 전원회의에서 비밀리에 당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고, 「공화국영웅」 칭호도 받는다. 당시 보도 상으론 사회주의 건설사업에의 총동원문제, 세금철폐 및 공산품 가격인하 문제 등이 의제였다. 김정일의 직위변화는 언급조차 없었다·
요즘의 북측자료는 8차 전원회의에서 『전체 당원들과 근로자들의 한결같은 의사와 염원을 담아 친애하는 김정일 동지를 주체혁명위업의 위대한 계승자로, 당과 혁명의 영명한 지도자로 높이 추대하였다』고 쓰고 있다 ( 『노동신문』91년 12월24일자). 74년 2월에 후계자로 결정했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당시 전원회의를 지켜본 전 북한고위관리는 후계자 공식확정은 75년 2월의 10차 회의에 가서야 어뤄진다고 증언한다. 이 증언을 따를 경우 북측이 후계자 결정시기를 1년쯤 당겨 공식화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아무튼 김정일의 정치활동에서 74년 2월은 중요하다. 북한의 김정일 전기 『인민의 지도자』 2권에는 그가 8차 전원회의에서 정치위원이 된 뒤 2월19일에 「온 사회의 김일성 주의화」를 선언한 것으로 돼있다.
평양에서 열린 전국 「당사상 사업부문 일꾼강습회」 에서였다. 전 북한고위관리는 이 강습회에서 김정일이 「당사상 사업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라는 4시간 짜리 연설을 통해 당 사상체계를 주체사상으로 일색화 할 것을 주장했다고 한다.

<74년 정치위원 발탁>
김정일은 온 사회의 김일성 주의화」관철수단으로 당의 「유일 사상 체계 확립 10대 원칙」이란 걸 내놓았다. 물론 선전·선동부문 브레인들의 합작품일 것이다. 「10대 원칙」 은 김영주가 조직비서 시절에 만들었으나 김정일이 새롭게 정비했다는 설명이 있다 .
전 북한관리에 따르면 이 원칙은 김일성의 62세 생일을 하루 앞둔 74년 4월14일에 김정일에 의해 발표됐다. 「김왈성 동지의 혁명사상으로 온 사회를 일색화하기 위하여 몸바쳐 투쟁하여야한다」(1항)로 시작되는 이 원칙은 「김왈성 동지가 개척한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계승하며 완성해나가야 한다」 (10항)로 끝난다. 마지막 항은 권력세습을 정당화하려는 것이었다.
주체사상에 관한 한 창안자 김일성과 후계자 김정일만이「이념해석권」 을 갖게 됐다. 북한에선 그밖에 누구도 이데올로기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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