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딴따라’ 할아버지 부천 영화제 스타 됐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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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일 개막한 제11회 부천 판타스틱영화제(21일까지)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사람은 누구일까. 스타 감독도, 스타 배우도 아니다. ‘무명의 배우’ 백연화(84·사진)옹이다. 백옹은 이번 영화제 ‘트레일러’ (영화제 홍보영상. 모든 출품작에 앞서 상영된다)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43초 길이의 짧은 영상이지만 부천을 찾는 시네필이라면 그를 도저히 피해갈 수 없다.

백옹은 만나자마자 “네, 네. 제가 거리의 악사입니다. 경례!”라며 우렁차게 말했다. 얼굴이 비칠 정도로 번쩍번쩍 광을 낸 검정 부츠, 왼쪽 가슴의 노란 꽃 한 송이, 반짝이 장식이 가지런한 검정 코트, 선글라스에 별이 네 개나 박힌 모자까지 복장이 특이하다. 먼 발치에서도 금세 알아볼 수 있는 차림이다.

“대단한 영광이죠. 하하. 사람들이 나이를 물으면 8학년 4반이라고 대답해요.”

백옹은 ‘트레일러’에서 파랑새의 꿈을 좇아가는 캐릭터를 연기했다. 꿈은 나이와 관계없다는 메시지다. 그를 캐스팅한 용이 감독은 “백옹은 꿈을 향한 우리의 모습을 몸 전체로 보여줍니다. 나이도 나이지만 외모 자체도 판타지죠”라고 밝혔다. 감독은 가수 박지윤의 ‘환상’ 뮤직비디오에 잠깐 나온 백옹을 보고 트레일러 출연을 제안했다.

백옹은 자칭 ‘거리의 악사’다. 직업은 ‘딴따라’라고 소개했다. 평상시에는 오후 6~8시 무렵 서울 종로5가 먹자골목을 돌며 즉석공연을 한다. 종종 경로잔치, 복지회관 잔치 등에 초대받아 무료공연을 펼친다.

“50년 전 유랑극단에서 공연을 시작했어요. 처음부터 무대에 설 수가 없어 청소하고, 세트 짓고 등등 잡일을 도맡았지요. 유랑극단이 사라지고 나서는 혼자 거리공연에 나섰습니다.”

백옹은 아코디언·기타·드럼 등 여러 악기를 다룬다. 그 중 최고 ‘종목’은 테너 색소폰. 주로 ‘목포의 눈물’ 같이 흘러간 옛 노래를 연주하지만 레퍼토리가 떨어지면 ‘학교 종이 땡땡땡’도 마다하지 않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이 개나 바람이 부나 항상 같은 복장이라고 했다.

“나는 단지 음악을, 색소폰 부는 것을 좋아해서 거리에 나옵니다. 상대방을 즐겁게 하는 것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요. 사람들이 찾으면 어디든지 달려갑니다.”
 

부천=글·사진 강준규 인턴기자(고려대 국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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