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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의 최고수 '리플리 병' 환자를 아십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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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태(42)씨는 2002년까지만 해도 화려한 학벌과 경력의 소유자였다. 서울대 경제학과와 미국 명문대에서 MBA과정을 마쳤다. CNN 기자와 마젤란펀드의 펀드 매니저를 거쳐 귀국 후 몇몇 방송 프로그램의 주요 패널로 출연 중이었다. 이것은 그가 거론했던 이력의 일부에 불과했다.

물론 나이에 비해 경력이 지나치게 화려하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는 그가 방송인이라는 이유로 그런 의혹을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방송국에서 어련히 알아서 검증했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반면 방송국에서는 그의 저서를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가 쓴 책의 저자 약력에는 화려한 이력이 빠짐없이 실려 있었다. 저자 약력을 의심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황씨의 욕심이 화를 불렀다. 그가 방송과 지면에 잇달아 얼굴을 내밀자, 그의 이력서에 등장한 대학과 직장 출신들이 본격적으로 제보를 해오기 시작했다. 그런 사람과 같은 학교나 직장에 다닌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급기야 한 방송사가 본격적으로 취재에 나섰다.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황씨의 학력과 경력은 모두 날조된 것이었다. 그의 최종 학력은 대졸 검정고시에서 일부 과목에 합격한 것이 전부였다. 미국 유학이나 직장 생활은 물론 서울대 졸업 사실조차 거짓이었다.

그가 이런 거짓말을 능수능란하게 된 계기가 더 놀라왔다.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공장에 다니던 황씨는 서울대 경제학과 출신의 노동 운동가들을 만나게 됐다. 그들에게 주어 들은 얘기들이 거짓말의 출발점이었다. 직장이 좋아지고 대인 관계가 넓어지면서 그의 거짓말은 더욱 잦아졌고 대범해졌다. 국내 최고 수준의 학력과 경력까지 날조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결혼까지 한 만큼 그의 인생 대부분이 거짓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주비엔날레 예술감독으로 내정된 동국대 신정아(35)교수의 학력 위조 의혹이 온 국민에게 큰 충격을 안겨줬다. 하지만 이와 비슷한 부류의 사건이 처음은 아니다. 5년 전에는 방송인으로 막 인기를 끌던 황인태씨의 학력 및 경력 위조 사실이 드러나 방송가를 경악시킨 일도 있었다. 신 교수 사건의 경우 아직 위조의 정도가 완전히 파악되지는 않았지만, 두 사건은 공통점이 많다. 두 사람 모두 젊은 나이에 비해 학력과 경력이 지나칠만큼 화려했다. 또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을 일궈나갔다. 그 과정에서 축적된 대인 관계를 적절하게 활용했다는 것도 비슷하다. 의혹이 제기되자마자 즉각 음모론을 편 것도 비슷하다. 신 교수는 지인들에게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자신을 음해한다며 억울하다는 취지의 메일을 보낸 것으로 확인됐다.

그렇다면 이들은 학력이나 경력을 위조했으면서도 왜 이렇게 당당한 것일까? 혹시 자신들이 꾸며낸 거짓말을 진심으로 믿는 것은 아닐까? 이런 점에서 황씨에게 학력 및 경력 위조 의혹을 추궁했던 방송계 인사가 하는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황씨는 날조된 학력과 경력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었다. 그가 졸업했다는 대학의 해당 연도 졸업생 명단을 들이대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시기해서 그렇다는 변명만 반복했다. 그의 이력서에 등장하는 모든 학교와 직장에서 보내온 확인서를 보고나서야 입을 다물었다.”

정신병리학자들은 황씨처럼 자신이 바라는 세계만을 진짜라고 믿고, 자신이 발을 딛고 사는 현실을 오히려 허구라고 믿는 것을 ‘리플리 병’ 혹은 ‘리플리 효과’라고 부른다. (물론 영화계에서 리플리 효과는 ‘에이리언’의 여주인공인 리플리처럼 여성들 스스로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 하는 경우에 쓰이기도 한다) ‘태양은 가득히’(1960년)에서 알랭 들롱(1999년 리메이크 된 ‘리플리’에서는 맷 데이먼)이 연기한 리플리 역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 영화에서 리플리는 사소한 거짓말 때문에 아이비리그 출신 재벌가의 아들인 디키 그린리프를 만나게 된다. 그 후 그의 삶을 동경하게 된 리플리는 점점 더 대담한 거짓말과 신분 위장으로 새로운 삶을 꿈꾼다. ‘태양은 가득히’의 원작 소설은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재능있는 리플리씨’(The Talented Mr. Ripley). 리플리가 주인공인 이 연작 소설은 1955년부터 1991년까지 모두 5편이 출간됐다.

리플리라는 가공의 인물이 정신병리학의 연구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20세기 후반부터다. 실제로 리플리와 유사한 말과 행동을 하는 경우가 자주 나타났기 때문이다. 물론 리플리병은 아직 공식 명칭은 아니고, 가설 수준이다. 13일 영국의 유력 일간지 인디펜던트가 신정아 교수의 가짜 박사 학위 소동을 두고 영화 제목을 빗대 ‘재능 있는 신정아씨(The Talented Ms. Shin)’라는 제목을 붙인 데는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리플리병 환자들은 개인의 사회적 성취욕은 크지만 사회적으로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통로가 봉쇄돼 있는 경우 자주 발생한다. 마음 속으로 강렬하게 꿈꾸는 것을 현실에서 이룰 수 없으면 가공의 세계를 만들어 그곳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영화 ‘태양은 가득히’‘리플리’가 다루고 있는 1960년대 미국이나 2000년대의 한국이나 그런 점에서 마찬가지다. 아직도 실체적 진실이 파헤쳐지지 않은 신정아 교수 사건은 처음도 아니지만, 끝도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이여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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