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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칼럼] 카다피 사례를 활용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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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근 몇주간 미국인들에겐 희소식이 쏟아졌다. 좁은 구덩이에서 웅크리고 있다 붙잡힌 사담 후세인은 현재 재판을 기다리고 있다. 이라크 채무 경감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특사로 파견된 짐 베이커 전 국무장관은 채권국들로부터 협조의 뜻을 끌어냈다. 이라크 재건은 앞당겨질 것이다.

이란도 일시적이긴 해도 우라늄 농축 작업 중단을 발표했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에 의한 불시 사찰을 수용키로 했다. 리비아 국가원수 카다피는 대량살상무기(WMD) 개발 프로그램을 폐기하고 사거리 8백㎞ 중거리 미사일 개발도 포기했다. 미국.영국.IAEA의 대량살상무기 사찰을 전격적으로 수용한 데다 미국이 주도하는 테러와의 전쟁에도 동참하겠다고 했다. 한발 더 나아가 리비아 정보부는 미국.영국에 '불량국가'들의 불법 핵 개발 움직임을 오래 지원해온 비밀 공급망과 테러 집단의 활동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리비아의 협조로 파키스탄 당국은 자국의 핵 과학자들이 이란과 리비아.북한의 무기 개발에 도움을 줘왔다는 사실을 시인하게 됐다. 모두 환영할 만한 뉴스다.

리비아의 변화는 미국을 상당히 만족시켰다. 미국이 이라크전에 동원한 군사적 수단보다 우수한 대안이라는 말을 덧붙이긴 했으나 하비에르 솔라나 유럽연합(EU) 외교정책 대표도 외교의 승리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외교는 진공상태에서 펼쳐지는 게 아니다. 복잡한 상황 논리라는 게 있다. 어떤 복합적인 동기가 작용해 카다피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당근에 대한 유혹 못지않게 채찍에 대한 두려움이 작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리비아와의 협상이 미국의 대(對)이라크 공격이 임박한 시점에 시작됐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또 카다피가 대화 상대로 유엔이나 IAEA가 아닌 미국과 영국을 택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국제적 제재로 인한 경제 충격과 외교적 고립에 따른 정치적 부담, 그리고 점점 커지는 국내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압력 때문에 카다피는 정권의 생존을 위해 드라마틱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또 투자, 외교적 승인, 그리고 다른 형태의 지원에 대한 서방의 약속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미.영은 보상에 앞서 리비아의 대량살상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철저하게 즉각적으로 폐기할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막판에 가면 부시 행정부는 '불량 국가들에 대한 정권 교체'라는 원칙을 조금은 양보할 것 같다. 실용주의자들은 테러와 대량살상무기 확산 방지 분야에서 카다피의 협조를 얻기 위해 악명 높은 독재자일지라도 거래를 트는 게 지불할 만한 대가라는 점을 인정할 것이다.

카다피의 변신이 김정일의 경쟁심을 일으키게 될까. 모를 일이다. 둘 사이엔 비교할 만한 점이 제법 있다. 둘 다 국민생활엔 관심 없는 잔혹한 전제 군주다. 또 테러리즘을 사용한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떠든다. 대량살상무기에 많은 투자를 했고 때문에 경제.외교적으로 큰 대가를 치렀다. 그러나 차이점도 있다. 북한의 핵개발 수준은 리비아보다 몇 단계 앞선다. 평양은 리비아보다 지역 분쟁을 일으킬 소지가 더 크다. 또 석유가 없는 북한은 마약이나 무기 등 위험한 상품을 팔아 경화를 확보하려 애쓰고 있다.

김정일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든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하지 않으면 비극을 맞을 것"이란 불량국가에 대한 카다피의 충고는 그의 대량살상무기 포기 결정만큼 시의적절한 것이었다.

카다피의 사례는 적절한 유인책만 있으면 협상을 통해 성과를 얻을 수 있음을 상기시킨다. 이런 접근은 또 귀중한 정보를 가져다 주기도 한다. 또 고립을 벗어나고, 안보를 개선하고, 경제성장을 가속해 정권생명을 연장시키겠다는 평양의 '뒤틀린 외교'에 대한 설득력 있는 대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김정일이 카다피의 사례에서 흥미점을 찾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아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마이클 아마코스트 전 美국무부 차관.브루킹스 연구소장
정리=정용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