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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움직여야 세상이 변한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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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호 05면

헬레나 노르베리-호지(Helena Norberg-Hodge)는 스웨덴 출신 여성학자로 유럽과 미국에서 연구생활을 하며 6개 외국어에 능한 언어학자였다. 1975년 재학 중이던 런던대 동양언어학과의 학위논문을 준비하기 위해 ‘작은 티베트’라 불리던 라다크를 찾았고, 1년 만에 라다크말을 익힌 뒤 장기체류를 결심했다. 건강하고 평화로운 공동체인 라다크의 지혜와 철학에 반해 이후 16년 동안 머물며 서구 산업문명을 비판하는 생태환경운동가가 되었다. 92년 쓴『오래된 미래-라다크로부터 배운다』(녹색평론사 펴냄)는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생태위기의 본질을 갈파한 이 분야의 고전이 되었다. 80년 국제조직인 ‘라다크 프로젝트’를 세우고 91년에는 ‘에콜로지 및 문화를 위한 국제협회’를 세웠다. 86년 대안적인 노벨상이라 불리는 ‘바른생활상’을 받았다.
그는 맨발이었다. 11일 오후 비 내리는 서울 화계사에 들어선 그는 두 손 모아 고개를 깊이 숙였다. 라다크의 불교 승려들과 교유했기 때문일까. 합장이 몸에 익었다. 긴 생머리에 면바지를 걸친 헬레나 노르베리-호지(61)는 환갑을 넘긴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힘차고 상큼했다.
불당에 들어서 불자들에게 말하는 모습도 명쾌했다. 쉽고 명료한 영어로 오늘의 세계를 비판한 그는 말했다. “지금 내 의견에 반대하시는 분이 있다면 그 얘기도 듣고 싶다.”

작은 공동체에서 대화를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지혜와 자비로 더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설명했다.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작은 모임을 많이 만들어 얼굴을 자주 맞대라고 권했다. 그는 서로 의견을 나누고 공유하는 나날 속에서 근대화 과정에서 파괴된 ‘진실된 우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진정한 미래는 오랜 옛 지혜 속에 있다”는 그의 메시지가 고즈넉한 법당을 울렸다. 불상을 배경으로 선 서양 여성의 자태가 독특하게 어우러졌다. 그리고 말씀이 울려 퍼졌다.

“서구 사회가 낙원처럼 인식되던 시대는 갔다. 세계화는 인류 모두를 가난하게 만드는 슬픈 현상이다. 노예제도는 없어지지 않았다. 금권 만능주의가 새로운 노예제도다. 불교 시각에서 오늘의 세계를 바라보면 이야말로 ‘무지’의 극치다. 깨닫지 못한 중생이 죽음의 길로 가고 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우리 내부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다. 또한 그 일이 외부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아는 것이다. 이런 현실을 알아차리는 것이 운동이다. 공동체 안에서 소모임을 많이 만들어 함께 책을 읽고 의견을 나누고 밥도 지어 먹는 것, 이런 사소한 것이 중요하다. 마음이 움직여야 세상이 변한다.”

수경 스님과의 만남
강연이 끝나고 마당에 내려선 그에게 청중 몇이 달려왔다. 모두들 『오래된 미래』를 손에 들고 있었다. 속표지를 펴 서명을 부탁하던 한 중년 남성은 “11년 전 이 책을 읽었을 때 받았던 충격과 감동이 지금도 생생하다”고 고마워했다.
화계사 주지인 수경 스님이 손님을 방으로 끌었다. 따듯한 차와 과일상이 마련됐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목이 말랐던지 차를 달게 마셨다. 차 맛이 좋다며 “차를 더 마실 수 있느냐”고 물었다. 수경 스님이 아예 큼직한 연꽃 모양 잔을 내왔다. 그러고는 두 사람의 대화가 시작됐다.

서울 화계사에서 스님들과 발우공양을 나눈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운데)는 공양 절차를 “최고의 식사”라며 즐거워했다. 왼쪽이 수경 스님, 오른쪽이 여봉 스님.

수경=세계 여러 나라를 다녀보시니 (반개발, 반세계화의) 희망이 좀 보이시는가.
호지=그렇다. 사람들이 지금 뭐가 잘못돼 있는지 알아차리고 있다. 마음의 변화가 시작됐다.
수경=불교 하신 분이니까 아시리라 믿는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우리 전체가 한 생명이요 한 몸’이라는 각성이 없다. 거대한 인간 중심의 세계, 자본과 대량생산체제의 도도한 흐름을 막아내기가 힘들다. 자기와 한 몸인 자연을 파괴하며 인간이 제대로 살 수 있을까. 한국 사회에는 아무리 둘러봐도 깨달음이 없다. 마음이 변화하는 조짐이 안 보인다.
호지=지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농경이다. 각 지역으로 귀농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특히 농촌으로 돌아가는 젊은이의 힘이 미래의 빛이 될 것이다.
수경=농민도 자본주의의 논리에 함몰돼가는 것 같다. 컴퓨터 먹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어쨌든 된장·고추장 먹고 살아야 하는데 이런 가치에 눈뜬 이가 너무 소수다. 지식인 사회가 오히려 대중이 이런 진실을 알 수 있는 길을 차단하고 있다.
호지=생산자와 소비자가 공동체 안에서 직접 관계를 맺고 거래하는 과정 속에서 인류의 미래가 바뀔 것이다.
수경=(한숨을 내쉬며) 그건 우리도 다 알고 있다. 하지만 민중이 다 머니, 머니, 머니, 돈 돈 돈 하니…. 지금 공동체가 다 무너지고 있다. 작은 농촌 마을이 정을 나누며 잘 살다가도, 예를 들어 골프장이 들어온다 하면 자연보다 먼저 사람들 마음이 파괴돼버린다.
수경 스님이 손에 들고 있던 염주를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손에 채워주며 덕담을 했다. “이게 염주인데 이놈 가지고서 세계를 구원하는 큰 힘을 쓰시오. 이렇게 살다가는 이 지구가 생명이 살 수 없는 땅이 될 시기가 가까워오니 무지한 이들의 머리통을 깨우쳐주시오.”

함께 나누는 발우공양
옆에서 말씀을 거들던 중현 스님이 한마디 했다. “두 분이 형제 같으시네요.” 그러자 수경 스님이 호지에게 나이를 물었다. 예순 하나라 하니 “난 오십 아홉이니 누나뻘이시네” 하고 손을 잡았다.
중현 스님이 수경 스님을 소개했다. “이 분이 불교환경연대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전 세계에서 불교적 시각으로 생태를 생각하는 이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증가하고 있지요. 오늘과 같은 만남, 교류가 잦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두 분 같은 선각자가 실천 연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 사람은 바로 지속적 네트워크를 이어가기로 약속했다.
“말을 많이 했더니 배고프네. 자, 공양하러 갑시다.” 수경 스님이 앞장을 서 발우(스님들이 쓰는 밥그릇) 공양(불교에서 행하는 식사)이 준비된 방으로 건너갔다. 영어가 유창한 여봉 스님이 옆에 앉아 발우공양을 설명했다.
김치·김·두부조림·땅콩절임·시금치나물에 감자 국을 곁들인 소박한 밥상이 나왔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왼손에 든 젓가락으로 제법 능숙하게 반찬을 떴다. 그는 밥을 먹을 때 무나 김치 조각을 남겨 뜨거운 숭늉으로 음식을 찌꺼기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이 닦아 먹는 과정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수경 스님이 “오늘 좋은 거 배우시네” 추임새를 넣으니 빙그레 웃으며 빈 그릇을 닦았다.
공양이 끝난 뒤 수경 스님이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에게 발우 일습을 선물했다. 그는 “최고의 식사를 했다. 매우 빠르고 깨끗하며 생태학 관점에서 최선”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두 사람은 ‘미래의 협력을 위해’라는 한목소리로 아름다운 만남을 마무리했다. 동양과 서양의 큰 마음 둘이 연을 맺은 오후,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땅을 힘차게 두드렸다.

지속 가능하고 평등한 삶을 위하여

『오래된 미래-라다크로부터 배운다(Ancient Futures: Learning from Ladakh(Rider, 1992)』의 우리말본이 나온 때는 96년 7월이었다. 격월간 잡지 ‘녹색평론’을 내던 김종철 영남대 교수가 녹색평론사라는 출판사를 차려 낸 첫 번역서다. 이 책을 처음 만졌을 때 느낌이 지금도 생생하다. 아주 가볍고 부드럽고 순했다. 재생 갱지에 단출한 흰 표지를 두른 책은 온몸 자체가 라다크의 얘기를 실어나르고 있었다.

첫 장을 넘기면 티베트의 정신적 스승인 달라이 라마의 서문이 나온다. “나는 우리의 행성의 위협받는 생태계에 대하여 저자가 갖는 우려를 공유하며, 그녀가 근대적 개발이 초래하는 많은 문제에 대하여 대안적인 해결을 모색하면서 행해온 일에 경의를 표한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프롤로그에서 “티베트 고원 위의 오래된 문화의 지방 라다크에서 얻은 16년 이상의 경험이” 자신을 얼마나 바꿔놓았는지 썼다. 그는 오늘날 제3세계의 문제는 많은 부분이 “식민주의와 오도된 개발의 결과”라는 결론에 이른다. 산업 단일문화의 확산은 다차원적인 비극이란 인식, 서구문화가 갈수록 정상적인 것, 유일한 방식으로 간주되는 위험을 경고한다. 그리고 대안을 내놓는다. “우리는 긴급히 지속가능한 균형-도시와 농촌, 남성과 여성, 문화와 자연 사이의 균형-을 향해 방향을 돌려야 한다. 라다크는 우리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상호 관련된 힘들을 우리가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함으로써 우리의 나아갈 길을 보여줄 수 있다. 이러한 보다 넓은 시각은 우리 자신과 지구를 치유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 필수적인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고는 라다크 얘기가 3부(제1부 전통, 제2부 변화, 제3부 라다크로부터 배운다)에 걸쳐 이어진다. 지은이는 에필로그에서 “아마도 라다크가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행복과 관련된 것일 것이다. 그것은 내가 더디게 배운 교훈”이라 했다. 그는 오늘날 서구를 지배하는 ‘돈’이나 ‘첨단기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인간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 수 있는 ‘공동체와 땅과의 긴밀한 관계’를 보았다. “삶의 다른 길이 가능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는 구절은 각성처럼 들린다.

마지막 장을 넘기면 옮긴이 김종철 교수의 말이 붙어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아직 구원의 가능성이 있고, 그 가능성의 진정한 원천은 우리 자신의 마음속에 있다는 이 책의 궁극적인 메시지일 것이다.”
11년이 지난 지금 읽어도 여전히 큰 울림을 주는 한마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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