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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마비 국내박사 1호 권영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손가락 하나 제대로 움직이기 힘든 전신마비 장애인이면서 얼굴에서 그늘 한 점 찾아보기 힘든 권영직씨(33·서울 도봉구 쌍문3동374).
그가 오는 25일 성균관대에서 일반인들에게도 큰 기쁨과 자랑인 박사학위(공학)를 받는다.
전신마비 환자로 국내 박사 1호가 되는 권씨에게 올해는 아무래도 생애 최고의 해가 될 것 같다. 4월에는 일생동안 그의 불편한 팔·다리가 돼 그를 돕겠다는 아름다운 반려자를 맞아 결혼하는가 하면 9월엔 미국 유학에도 「도전」, 장애인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교수」가 되겠다는 희망에 한발 더 다가서기 때문.
그는 『지금보다 더 큰 육체적 시련이 있다 해도 얼마든지 해낼 자신이 있다』면서 오히려 「멀쩡한 육체의 큰 행운」속에 살면서 좌절하고 자포자기하는 이웃들에게 「힘을 내라」고 했다.
그러나 불과 4년 전인 89년 여름만 해도 그는 설악산을 뛰어오르며 건강한 육체의 젊음을 노래했던 평범한 젊은이였다.
박사과정 3학기 째 머리를 식히기 위한 여름방학 설악산 산행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목은 그를 또 다른 운명으로 이끌었다.
그를 태운 승용차가 마주 오던 차를 들이받는 자동차 사고가 발생한 것.
순간적인 혼절에서 정신을 차린 그는 손마디 하나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음을 발견하고 절망해야 했다.
사고현장 주변의 작은 병원 등을 전전하며 손을 써줄 것을 애원했으나 모두 큰 병원으로 가라며 등을 떼밀어 12시간이나 방치된 다음에야 가까스로 서울대병원에 입원할 수 있었다.
진찰 결과 경추 6, 7번이 골절됐다는 진단이 나왔고 골반 뼈를 잘라 골절된 경추에 뼈를 갖다 붙이고 동여매는 대수술을 받았다. 병원 측은 한달 반 후 재활원으로 옮겨 물리치료를 받으라고 권고할 뿐 언제쯤 일어나 걸을 수 있는 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았다는 것.
식구들의 도움으로 휠체어에 앉았지만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돼버렸다. 밥도 어머니가 입에 떠 넣어 주어야 먹을 수 있었다.
연세대 재활원으로 옮긴 그가 해야 할 일은 결국 정상인으로 돌아갈 수 있는 노력이 아니라 전신마비 상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단지 생을 연명하는 몇 가지의 원초적 기술습득이었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힘들게 얻은 외아들(1남3녀 중 막내)에 대한 사랑과 정성이 지극했던 어머니를 떠올리면 「어머니에게 짐만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으로 오열해야 했다. 하루종일 침대에서 누워지내야 했던 그는 결국 『어차피 살 것이라면 언제까지 누워서 살 것인가?』스스로에게 자문했고 현실을 받아들여 어머니에게 보답하는 길은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길을 찾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3개월 여가 지나면서 그는 차차 생에 대한 강한 애착과 집념을 되찾기 시작했고 도저히 믿기지 않았던 자신의 몸도 제 것으로 받아들였다.
『옛날 생각에 매달릴수록 내게 도움이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한 그는 사고를 당하기 전 박사과정학생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계획을 나름대로 까놓고 이의 실천을 위해 혼신을 다했다.
밥을 혼자 먹기 위한 숟가락질이 급했다. 힘이 없어 글씨를 쓸 수 없는 손가락에 보조기를 끼고 사고 전 익혀놓았던 컴퓨터의 자판기를 두드리는 연습도 해됐다. 침대에서 드러누워 보내기보다 좀더 많은 시간을 휠체어에 앉아보내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몸의 힘을 키우기 위해 물리치료실에가 미친 듯이 체력훈련에 매달렸다.
한국에 장애인을 위한 마땅한 보조용구가 없다고 판단한 그는 외국재활용품회사 카탈로그를 입수, 그가 컴퓨터를 이용해 박사과정 학생으로 되돌아가는데 필요한 재활용품들을 우편으로 신청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오래 휠체어에 앉아있을 경우 욕창을 방지할 수 있는 방석, 손에 연필을 낄 수 있는 보조기, 컴퓨터를 칠 수 있는 압봉 등이었다.
피눈물나는 노력 끝에 6개월 후 퇴원할 때엔 거의 하루를 앉아서 지낼 수 있게 됐고 의사들도 척추손상환자로는 더 이상의 성과를 기대하기 힘들 정도로 상태가 좋다며 박수를 보냈다.
공부의 방향도 실험실을 이용하기보다 자료종합과 분석의 프로그램 개발로 바꿔나갔다.
결국 휴학계를 낸 1년반만에 재 입학했다.
경찰공무원을 지내고 정년 퇴직한 아버지는 그를 위해 운전을 새로 배워 수원캠퍼스까지 데려다주고 강의가 끝날 때까지 어머니와 함께 몇 시간이고 기다려주는 지극한 사랑과 정성을 쏟아 부었다. 위·아래층의 강의실을 옮겨다녀야 할 때엔 후배들이 그의 휠체어를 들어 자리를 바꿔주었다.
그는 「자동차엔진의 열 전달에 관한 연구」로 박사과정 입학 5년 만인 이 달 말 박사학위를 받게된다.
4월3일 오후 2시30분 어린이회관에서 권씨를 일생의 지아비로 선택한 양신자씨(27)와의 사랑은 컴퓨터통신이 중매쟁이가 됐다.
방안에서 컴퓨터통신으로 2백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고 첫 교신이후 6개월 만인 지난해 8월 양씨의 부모로부터 결혼 허락을 받아냈다.
신부감 양씨는 숭실대 전산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컴퓨터학원강사로 재직중인 건강하고 아름다운 용모의 소유자.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신부의 부모는 건강한 사고와 열심히 생활하는 권씨의 모습 때문에 두 사람의 결혼을 허락하게 됐다는 것.
『몸이 좀 불편하다는 생각뿐 사고 이전보다 훨씬 적극적이 되고 판단력도 예리해진 것 같다. 내가 다친 것은 또 다른 쓰임새를 위한 하늘의 뜻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이제 걱정도 별달리 없다』며 환히 웃는 그는 더 이상 장애인이 아니었다. <고혜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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