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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배신자”… 갈라선 의형제/정주영­김동길의원 애증의 전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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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결연사실 공개에 심한 분노” 정주영/“탈당 배후조종 당깨려한다” 김동길/“돈잘쓴다­말 잘듣는다” 착각서 출발/대선직전 김씨에 “백억줄테니 결혼” 제의도/당권이양 파기·기금백지화도 원인
도원의 결의로 의형제를 맺었던 국민당 정주영 전 대표와 김동길신임대표가 서로 배신당했다며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다. 의형제간의 「사랑과 미움」에 정씨의 아들 몽준씨까지 끼어들어 접입가경이다.
국민당 대표로 추대된 김 박사(그의 통칭)는 정씨와의 오랜 인연을 끊기로 작심한 것 같다. 국민당을 정씨의 「사당」 이미지로부터 구출하고 자신을 정씨와 차별화할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김 박사는 정씨가 탈당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그를 「신의없는,무책임한 사람」이라고 몰아붙였으며 대표직을 추대받고 가장 먼저 정씨와의 「담판」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러자 정씨의 친위세력이라 분류될 수 있는 왕당파 의원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이들은 한결같이 『정 대표를 궁지로 몰아넣어 당을 무너뜨린 사람이 바로 김 박사』라며 김 박사가 정 대표에게 그럴 수 있는가라는 「배신감」을 감추지 않고 있다.
싸움은 더욱 노골화되고 있다. 김 박사는 왕당파 의원들의 반발소식을 접하고는 17일 아침 『탈당한 사람이 탈당에 그치지 않고 당을 깨려는 것이 문제』라며 「정씨를 배후조종자」로 겨냥했다. 『나를 나무위에 올려놓고 흔들려 한다』는 표현도 불사했다.
비슷한 시간 탈당을 유보했던 정씨의 6남 정몽준의원은 갑자기 탈당을 선언하면서 「이례적」으로 기자회견을 자청,아버지 대신 김 박사의 비난공세를 맞받아쳤다.
정 의원은 『김 박사는 당관계를 떠나 대학시절부터 알았으며,정 전 대표도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알아왔다』고 사연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는 김 박사가 「의형제 결연」을 공개한데 대해 『한국식 가치규범에서는 집안일과 바깥일을 구분해야 한다. 그런데 김 박사는 집안일을 밖에서 얘기해 집안과 바깥에 모두 도움이 되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김 박사를 「집안 사람」으로 비유,김 박사의 변신을 「공적인 논리나 명분」 차원을 떠나 「인간적인(가족적인) 배신」으로 규정하는 싸늘한 표현이다.
역시 비슷한 시간 대변인직을 사임한 정씨의 측근 변정일의원은 정 의원의 탈당에 대해 『아버지(정 전 대표)의 뜻이 반영된 것으로 본다. 김 박사가 언론에 얘기한 것이 촉발제가 됐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정씨가 김 박사의 「의형제 결연」 공개에 분노했음을 의미한다.
김 박사와 정씨의 오랜 인연은 이제 악연이 된듯하다. 김 박사와 정씨의 인연은 어떤 것이었일래 왕당파들이 오히려 김 박사를 「의리없는 사람」 「인간적인 배신자」라고 공격하는 것일까.
정씨와 김 박사의 인연은 적어도 20여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두 사람의 관계는 김 박사의 누나인 고 김옥길여사(전 이화여대총장·문교부장관)를 통해 맺어졌다. 정씨는 25년전 교육운동인 지역사회학교운동을 시작하면서 교육계 인사들과 많은 친분을 쌓았다. 가난한 사학들에도 많이 도와준 것으로 알려졌다. 그중 이화여대는 정씨가 집중적으로 도움을 준 대학이며,김옥길 당시 총장과도 절친한 사이였다.
김 총장은 미국에서 돌아온 동생 김 박사를 정씨에게 소개했으며,김 박사는 유창한 언변과 부드러운 인상으로 정 대표와 가까워졌다. 정씨는 현대회장으로 재직하던 지난 수십년간 문화계 인사들과 어울리기를 즐겼으며,그중에서도 교수들과 가장 많은 모임을 가졌다고 한다. 그런 자리에서 만날때마다 김 박사는 정씨를 「괜찮은 사람」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창당초기부터 관계해온 한 현대관계자는 『김 박사와 정씨의 친분이 워낙 두터웠기 때문에 우리가 창당작업을 시작한 때와 비슷한 시기에 김 박사가 태평양시대위원회를 만드는 것을 보고 이미 합당을 예상했다』고 말할 정도다. 하지만 김 박사 자신은 『몇차례의 학자초청모임에서 만난 정도지 특별히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며 친근감의 정도를 약하게 평가한다.
어쨌든 호의적이던 친분은 김 박사가 정치에 뛰어들면서 더욱 각별해졌음이 분명하다. 정씨는 「공동대표」와 「인기있는 사람이 대통령후보가 된다」는 원칙아래 결합을 약속한뒤 창당도 하기전에 「의형제 결연서약서」를 김 박사에게 내밀 정도였다. 전통적 유교식 사고방식과 일본식 교육을 받으며 자란 정씨에게 있어 「의형제」 결연은 각별한 애정의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압구정동의 80평 아파트 한채도 그에게 내놓았다.(최근 열쇠를 다시 거두어가고 김 박사는 신촌 본가로 돌아왔지만)
이후 총선과 대선을 거치면서도 정씨는 애정을 잊지 않았다. 김 박사와는 수시로 독대했으며 어느 누구보다 그를 믿었다. 유세 과정에서도 김 박사가 자신을 『백년에 한번 날까말까한 대통령후보,아니 14대 대통령이신 정주영씨』라고 소개한뒤 연단에 나서는 것을 가장 좋아해 큰 유세에서는 꼭 김 박사를 앞세우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김 박사가 자신의 앞순서로 유세하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뒤에 앉아 시종 흐뭇한 미소를 잊지 않았다.
정씨는 또 대선을 얼마 앞둔 어느날 갑자기 김 박사의 집을 찾아 『결혼하시오. 그래서 자식도 낳고 키워야 하는 것이오. 평생 아내와 자식들이 먹고살 수 있도록 내가 1백억원을 줄테니 돈 걱정은 말고 결혼하시오』라고 권유하기도 했다고 한다. 정씨의 성격으로 볼때 누구의 집을 찾아간다는 것은 대단한 애정의 표시다. 더욱이 「돈아끼기」로 유명한 그가 1백억원을 주겠다고 약속한 것은 엄청난 「사건」이다.
김 박사 자신도 『그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정 대표가 형님이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기억할 정도다. 정씨는 이후 당시의 제안에 대한 김 박사의 「거절」을 놓고 『정말 훌륭한 사람이야. 내가 1백억원을 준다는데도 안받겠다고 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 교수라서 그런지 정말 깨끗한 사람이야』라며 극찬하기도 했다. 아마 두사람의 관계가 가장 좋은 때였던 듯하다.
또 무슨 급한 일이 있으면 먼저 「김 교수」를 찾았다. 대선에 패배한 참담한 심정에서 서산간척지로 내려가는 날까지도 김 박사를 가장 먼저 불러 만났다.
그러나 김 박사의 마음은 이미 조금씩 정씨를 떠나고 있었다. 김 박사는 창당 이전에 다짐한 「공동대표」 「대통령후보」 약속이 무산됐음에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실망감」을 느꼈다.
대선 과정에서도 정씨는 김 박사의 훌륭한 찬조연설에 흐뭇해했지만 김 박사의 애정은 점점 식어가고 있었다. 김 박사의 조언도 받아들여지지 않기 시작했다. 김 박사는 유세장에 등장하는 무개차 위에서 현대맨으로무터 전달받아 정씨에게 전달한 쪽지가 「정 후보의 당선」을 확신하는 외국언론의 여론조사결과임을 보고는 『더이상 어쩔 수 없는 정보의 왜곡을 절감했다』고 한다.
김 박사는 대선운동이 본격화되려던 지난해 9월부터 정씨에게 『후보는 대선운동에 전념하기 위해 당권에서 손을 떼라』고 요구했다. 『당권을 누구에게 주라』는 건의는 없었다 하더라도 당시 「2인자」는 당연히 김 박사 자신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이 부분과 관련,일부에서는 김 박사의 「당권욕심」을 비난하기도 한다. 어쨌든 정씨는 당권을 주지 않았다.
대선에 패배한뒤 비로소 정씨는 당권을 맡을 「직무대행」으로 김 박사를 지명하려 했으나 이미 입당해있던 입당파 최고위원들의 반대로 무산됐다. 김 박사가 정씨와 독대해 「약속이행」을 주장했다가 『내가 좋아서 정치했나. 노태우가 현대를 하도 못살게 해 한거지』라는 숨겨온 진심을 엿본것도 이때 전후로 추정된다.
김 박사는 이때부터 반기를 눈에 띄게 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람은 누구나 신의를 지켜야 한다』(1월4일 시무식)라는 간접적 경고발언으로 시작,급기야 1월6일 아침에는 최고위원직 사퇴를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이때도 정씨는 회의실을 박차고 나가는 김 박사의 뒤를 쫓아 김 박사 방으로 내려와 10여분간 독대하면서 설득했다. 물론 돌이킬 수 없는 결별은 이미 김 박사의 마음속에 굳어 있었기에 설득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정씨 역시 자신의 손을 뿌리치고 떠난 김 박사에게 단호한 결별을 선언했다. 1월12일 『2천억원 기금은 없던 일로 하겠다. 정치 2선후퇴도 있을 수 없다』며 김 박사가 요구한 두가지를 모두 거부했다. 1월13일 현대 영빈관에서 두사람의 마지막 독대가 있었다. 정씨는 『의형제 결연은 유효하다』면서 『대선출마를 사과하는 얘기를 다음 당무회의에서 하겠다』고까지 양보했으나 끝내 「2천억원 기금」 약속에 대해서는 묵묵부답이었다.
왕당파들은 김 박사가 이같은 일련의 과정을 통해 정씨로 하여금 정치를 포기하게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김 박사는 이같은 정씨의 불쾌감 역시 신뢰하기 힘든 그의 「정치인 답지 않은 성격」이 자초한 것이라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두사람은 서로를 잘못 본듯하다. 정씨는 「말잘 듣는」 김 박사로 알았고,김 박사 역시 「돈 잘쓰는」 정씨로 생각했던 것이다.<오병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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