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않고 경제만 하겠다”/돌연 정계은퇴 선언한 정주영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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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손실 줄이려는 「사업가적」 계산/사법 처리·당내 반발이 결정적
정주영대표의 9일 정계은퇴 선언은 한 재벌의 정치실험이 완전히 실패로 끝났음을 내외에 선언한 것이다.
정 대표의 정치참여는 애시당초 「정치발전」 운운하는 정치철학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정 대표 개인의 권력욕과 기업을 정치적으로 발전시켜 보려는 사업구상의 일환이었음이 증명된 것이다. 정치에사업적 목표를 설정하고 온갖 투자를 아끼지 않았으나 결국 실패함으로써 더이상 버틸 수 없어 손을 들고만 것이다.
쉽게 말해 대권도전에 실패한 이상 더이상의 투자는 오히려 사업에 도움이 될수 없다는 판단이 작용한 듯이 보이며 이렇게 하는 것이 보다 큰 손실을 줄일 수 있다는 사업자적 계산이 엿보인다.
정 대표는 지난해초 정치참여의사를 밝힐 당시부터 오로지 「대권」만을 목표로 정해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해 「수주」를 하던 사업가적 수법으로 「필승」을 낚으려 했다. 그러나 대권과 공사수주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정 대표는 장기적 정치참여계획보다는 대권승패가 가려지는 연말까지의 「1년계획」만 가지고 정치에 뛰어들었다. 장기적 정치발전을 위한 포석은 처음부터 없었으며,일단 타당공천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 원내교섭단체 구성에 성공했던 것이다. 처음에 『대권의 뜻이 없다. 킹메이커가 되겠다』고 말하면서 여러 정치지망생들을 모았다가 나중에는 『내가 후보가 돼야겠다』며 스스럼없이 나선 것도 「단기 승부」를 노렸기에 가능한 전략이었다.
단기전략 위주로 건당승부를 걸었기 때문에 정치인이면 당연히 존중해야할 「명예」「명분」은 별로 존중하지 않았다. 약속파기를 여반장으로 하면서 짧은 기간에 최대의 투자를 했던 셈이다. 큰 공사를 따내려는 건설회사 회장의 집념과 도전자세가 더 두드러졌다.
그러나 불행히도 정 대표의 확신은 들어맞지 않았다. 정 대표를 아는 사람들은 이미 대선결과를 보면서 그의 은퇴를 확신했었다.
정 대표는 당초 정치참여의 목적이었던 「사업=현대의 발전」을 위한 다음수를 생각했을지 모른다. 물론 결론은 무익한,오히려 현대발전에 유해한 정치의 청산쪽으로 났다.
실제로 정 대표는 『정치는 계속한다. 국민당을 건전야당으로 만들겠다』고 공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정리작업을 계속해 왔다.
대선결과가 나온 다음날인 12월19일 서산에 칩거중이던 정 대표는 김효영사무총장 등 측근을 불러 「기구축소」와 「전당직자(지구당 포함) 사표접수」를 지시했다.
곧이어 바로 「모든 현대맨의 철수」도 지시했다. 이때 현대맨들은 텅빈 당사를 뒤로하며 『끝나는구나』하고 독백했었다.
반면 정치계속의 의지도 전혀 없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정 대표는 최대한 「절약형」으로 당기구를 개편하면서도 정리의 시기를 고민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리한다는 원칙은 섰지만 이미 쏟아부은 투자에 대한 이익환수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정 대표가 추구하는 이익환수는 그에 대한 사법처리와 직결된듯 하다. 기소되기 전에는 그에게 사법처리에 적절히 대응하기 위해 「공당의 대표」 자격이 필요했다. 그러나 정 대표가 정당대표로 있는 것이 김영삼 차기대통령의 「확고부동한 의지」나 검찰의 「기소」단행을 누그러뜨리지 못할 것이 확실해지자 대표직마저 포기,오히려 선처를 바라는 쪽으로 전략을 바꾼 것 같다.
정 대표는 사법처리를 몹시 두려워했다. 일본으로의 비밀출국은 이같은 심정의 일단을 반증한다. 막상 기소되자 정 대표는 당일인 6일 오후부터 집안에 칩거하다가 8일 새벽 창당기념식에도 불참하고 서산으로 내려갔다. 애써 피해보려던 기소에 충격을 받았다.
당내반발 역시 정 대표를 강하게 밀쳐냈다. 김동길의원이 「2선후퇴」를 주장하고 떠난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당직자들의 목소리는 지난 1일 정 대표가 일본에서 귀국한 이후 본격화됐다. 『뭔가 결심하지 않았겠느냐』는 의구심속에 정 대표를 만난 당직자들은 당의 사활이 걸린 2천억원기금에 「여전한 정 대표」를 확인하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돈도 안내놓는 판에 「공당화」란 사당의 주인공인 정 대표가 물러나야 한다는 얘기다.
결국 정 대표는 자신이 일군 대역사인 서산간척지에서 하룻밤을 지새며 자신의 본업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것이다.
정 대표는 이미 결심을 읽을 수 있을 정도의 굳은 표정으로 9일 오전 10시 의원총회시간에 맞춰 출근,최고위원들을 불러 통보했다. 이어 의총에서 약 1분간 사퇴의 뜻을 밝힌뒤 옆문으로 빠져나가 평생 가꿔온 산업의 현장 울산으로 내려갔다.
정 대표는 마지막까지 자신과 현대에 대해 고려,김영삼 차기대통령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자신의 정계은퇴의미를 확실히 전달한 셈이다. 김 차기대통령에 대한 사과가 정 대표의 다음 행보에 숨통을 터줄지 지켜볼 일이다. 김 차기대통령이 원칙에 얼마나 충실한가를 읽을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오병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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