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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째「죽은 동물 생명 불어넣기」|"기술보다 예술로 봐주었으면…"|할머니 박제사 원효식씨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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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펄펄 뒤는 생선은 앉은자리에서 회를 쳐 먹으면서 죽은 동물의 박제를 만드는 일은 끔찍하다고 고개를 흔드는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맥이 쭉 빠진다』는「할머니 박제 사」원효식 씨(62·대일기획 대표)는 올해로 박제 경력 26년째의 베테랑이다.
곱 상한 얼굴, 조용하고 여린 말씨가 얼핏 죽은 동물을 능수 능란하게 주무르는 박제 사로서의 그와는 거리가 있는 듯 보이지만 원씨는 최근 개관된 서울대공원 동물표본전시관의 2백여 박제 및 골격표본의 70∼80%를 만들어 내 이 분야 1인자로서의 위치를 과시하고 있다.
원씨는 지난 67년 박제사의 길에 들어선 이후 코끼리·사자·코뿔소·말·사슴·악어에서 개구리·닭·토끼·물고기에 이르기까지 그 동안 안 해 본 동물의 박제와 골격표본이 없을 정도. 그는『살아 있는 것 이상으로 생동감 있는 박제를 만들어 사람들이 한번씩 손으로 만져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고 했다.
18세에 결혼, 2남3녀의 어머니로 평범한 가정주부였던 그가 느닷없이 박제사가 된 것은 집안에서 몇 마리씩 기르던 고운 새가 죽어 버리자 이를 그냥 버리기 안타깝다는 마음에서 비롯됐다.
아이들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부업으로 사랑 앵무·문조·호금조·금화조 등의 새를 쳤던 그는 책방에서 헌책을 사다가 공부하면서 식구들이 잠자는 틈을 타「죽은 새에 생명 불어넣기」작업인 박제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죽은 것의 내장을 모두 빼내고 살과 분리된 털·껍데기만을 재료로 삼고 살과 내장 대신 솜이나 발포 성 우레탄 등을 채워 넣어야 하는 작업이 손에 피를 묻혀 가면서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에 맨 처음에는 머리카락이 쭈뼛해질 정도였다는 것.
얼마 후「엄마가 몰래 박제를 만든다」는 사실을 알아낸 자식들이『제발 그만 두라』고 애원, 이를 달래느라 진땀을 흘렸다고 털어놓는다.
그러나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 점차 살아 있는 것과 얼핏 구별이 안될 정도의 박제를 만들어 내는데 맛이 들린 그는 막무가내였다.
친구들이 기르는 새나 애완동물이 죽을 경우 보관해 줄 것을 부탁해 놓고는 이를 가지러 한밤중에도 달려가곤 했다. 또 마땅한 박제거리가 없을 때에는 당시 청계천 조류 상을 돌며 죽은 새를 넘겨줄 것을 부탁해『좀 머리가 돈 사람이 아니냐』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고 전한다.
처음에는『한국에 서식하는 새는 모조리 박제를 만들어 보자』는 목표를 세워 놓고 주로 조류박제를 했으나 점차 그의 작품을 보고 사방에서 의뢰를 해와 작품. 대상의 범위를 넓혀 가기 시작했다.
박제표본들이 전시돼 있는 대학박물관·동물원 등을 둘러보고 살아 있는 동물의 사진을 빠짐 없이 찍어 동물의 생태를 꼼꼼하게 파악하는 등 독학으로 박제사가 된 그의 실력이 본격적으로 외부에 알려진 것은 6년여 전 처음으로 서울대공원의 박제표본 계약을 따내면서부터.
그 동안 남모르게 갈고 닦은 그의 실력이 빛을 발할 절호의 찬스를 맞이한 것.
그가 가장 자랑스런 작품의 하나로 손꼽는 것은 80년대 중방뚝섬 경마장을 휩쓸었던「무적의 명마」인「포경선」박제. 92년 5월 이 말이 죽자 박 피하는데 만 세 사람이 매달려 20시간을 들였고 결국 40일을 꼬박 씨름해 죽은「포경선」에 제2의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에 따른 수고 료는 3백50만원.
현재 과천 마사 박물관 입구에서 살아 생전의 위용을 자랑하는「박제 포경선」을 대할 때마다 그는 『박제사의 한 일생이 헛되지 않았음에 감개가 무량해 온다』고 전했다.
서울대공원의 동물 박제 및 골격표본 2백 점 중 그가 해낸 작품은 코끼리·쌍봉 낙타·기린·얼룩말·늑대 등 약 1백60점.
죽은 키다리 기린의 가죽을 감쪽같이 살과 분리, 몸체의 곡선이 유려한 기린의 몸통을 그대로 만들어 넣은 후 배 부분을 실로 꿰매 마무리해야 했던 그는 워낙 큰 키를 가진 기린이었으므로 균형을 잡아 제대로 서게 하는데 비지땀을 쏟았다고 털어놓는다.
사람들에게 동물의 골격을 여실히 보여주는 골격표본을 만드는 일도 그가 박제와 함께 병행하는 일.
그는 87년 지구상의 현존 포유류 동물 중 가장 크다는 코끼리의 골격을 짜 맞추어 내는 행운을 잡고는 뛸 듯이 기뻐했다.
1년 전 사고 사를 당해 대공원우리아래 묻혀 있었던 4t짜리 코끼리를 파내 새로 뼈마디를 짜 맞추어 하나의 완성된 코끼리골격으로 다시 세워 놓는 일이었다.
그때까지도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발굴현장을 지휘해야 했던 원씨는 2t여의 뼈 무더기를 포천 냇가로 실어 나른 후 뼈에서 살점과 냄새·잡티를 완전히 분리해 내기 위해 열흘동안 뼈를 삶아 내는 작업을 계속해야 했다.
1t이나 되는 두개골과 골반 골을 삶고 표백할 마땅한 용기가 없어 궁리 끝에 청계천에서 정화조 통을 사다 써야 할 정도였다는 것.
그는 장정 4명이 한꺼번에 간신히 들 수 있는 두개골과 2백여 개의 뼈마디를 짜 맞추느라 40여 일을 두문불출하며 매달렸다. 그대가로 2백 만원을 받았다.
원씨는『골격표본의 경우 세월이 흐른 후에도 뼈에서 기름이 흐르거나 누렇게 변색되지 않아야 한다. 뼈의 굵기에 따라 정확하게 삶는 온도와 시간을 산출해 내야하며 적정량의 표백제와 중화 제, 뼈와 뼈를 이어주는 투명실리콘도 잘 만들어 내야 하는 등 기술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처음에는 멀쩡해도 초보자가 만든 것은 세월이 가면 귀나 눈·코 등의 섬세한 부분이 쭈그러들어 금방 차이가 나게 마련이라고 덧붙였다.
신촌으로 가는 대로변 허름한 건물의 3층과 옥상의 창고 같은 공간을 작업실로 쓰고 있는 그는『살아 있는 것을 밀렵해 박제 화한다는 잘못된 인식을 갖지 말고 박제를 죽어 간 동물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되살리는 예술의 한 분야로 인식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현재 박제 사에 대한 자격증은 없고 대부분 숨어 작업하기 때문에 그 수를 파악하기 힘든 상태.
그 동안 15명의 박제 사를 후배로 양성해 냈다고 자부하는 그는 최근 두 명의 후배들을 데리고 수안보 한전연수원, 수원 학생도서관, 나주의 학생과학관등에 표본 관 설치작업도 해냈다. <고혜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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