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해」에 책 망신(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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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책의 해」가 시작되는 벽두부터 표절 모작을 둘러싼 책 소동이 벌어지고 있다. 한 신문사의 신춘문예 당선작이 기성작가의 작품을 상당부분 옮겨썼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당선이 취소됐다. 또 박사면서 대학강사인 사람이 쓴 소설이 여러 작가의 작품을 베낀 이른바 「혼성모방」작이라는 비난이 일자 출판사가 사과문을 내고 작품을 수거하고 발간을 포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이번엔 작가가 남의 작품을 베낀 것은 자신이 아니고 출판사측이라면서 고소를 하고 출판사가 맞고소를 하기에까지 이르렀다.
사건의 진상이야 작가의 원고와 출판사측 원고를 대조만 해봐도 금방 가려질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어째서 문단풍토가 여기에까지 이르렀고 글과 책을 생명처럼 다뤄야할 문사집단의 풍토가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느냐는 점이다.
한때 「동의보감」이란 소설이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된 다음부터 출판가에는 이상한 풍조가 일기 시작했다. 저자나 작가의 유명도와 관계없이 글줄이나 쓰는 사람을 동원해서 역사 인물중 한사람의 일대기를 써서 엄청난 광고만하면 베스트셀러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해괴한 풍조다. 사실 이런 출판전략으로 몇몇 출판사가 상당한 성과를 거두면서 이젠 이 방식이 출판가의 유행처럼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문제가 된 소설도 결국 이런 맥락에서 쓰여졌고 출판된 것이다. 어쩌다 발간된 책이 아니고 요즘 출판가의 구조적 틀속에서 제작된 것이어서 앞으로도 이런 책은 숱하게 쏟아질 가능성을 안고 있다.
책이란 그것이 소설이든 연구서든 작가의 뼈를 깎는 아픔과 진통을 통해 일구어낸 창의적 결집체다. 출판사는 작가의 이 노고를 정성스레 한권의 책으로 묶는 성의있는 과정을 거친다. 작가와 출판사의 진통과 성의속에서 문화와 예술이 싹을 틔우는 것이다.
이런 기본적 문화 활동들이 최근 들어서 단숨에 무너지고 있는 한심한 작태를 지금 우리는 보고 있다. 표절·모작·광고공세로 책을 판다는 사고방식은 우리의 기본적 문화활동을 파괴하는 작태일뿐만 아니라 그나마 우리마음속에 남아 있는 책에 대한 외경과 권위마저 뿌리째 뽑아가는 반문화행위라고 본다. 이런 부끄러운 풍조가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사회에서 구조적으로 자리잡고 있는 그 사회의 문화와 정신세계는 병들 수 밖에 없다.
책의 해를 맞아 책의 외형적 전시에 골몰하는 행사에만 치중할 일이 아니다. 저질의 책을 내고 부끄럼없이 과대광고를 일삼는 출판업자가 더이상 발을 붙이지 못하게끔 출판협회 스스로가 자정차원에서 이들을 경고하고 제동을 거는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또 아무렇게나 한권의 소설을 썼다고 해서 작가행세를 하는 문단풍조도 차제에 근절되게끔 하는 문단의 엄격성도 함께 거론되는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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