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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력 좀먹는 행정규제(사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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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어느 경제단체가 우리나라의 행정규제 실태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직원에게 직접 공장설치를 위한 절차를 밟도록 했다. 그러나 관청을 드나든지 1년이 지나도록 완결은 까마득했다. 3백여건의 서류를 만들어 각 행정기관을 거치기에는 인내의 한계를 넘어섰다. 어찌나 까다로웠던지 결국 그 단체의 체험을 통한 행정규제 테스트는 중도에 포기되고 말았다. 바로 이것이 우리나라 기업 여건이다.
행정규제 완화는 변화하는 국내외 환경에 맞추어 경쟁력을 기르기 위해 시급하고 불가피한 일이다. 이 문제는 5공때부터 정책의 주요 우선순위에 올라 있었다. 6공정부에선 공장설립절차·법정고용 의무제·수출입 절차 등에 관한 많은 행정절차를 「획기적」으로 완화하는 내용의 종합대책을 작년에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당초의 규제완화 의도가 현장에 반영되기에는 아직도 고쳐야할 점이 수두룩하다.
김영삼차기대통령이 선거공약에서 행정규제 완화를 거듭 강조한 것은 경제활동에서 빚어지고 있는 행정의 비효율과 민원을 대폭 수용하려는 강한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한 강한 의지가 어느만큼 현장개혁으로 연결되느냐가 문제다. 구서독이나 일본 또는 대만에서 전환기에 성공적인 경제도약이 가능했던 것은 요시다나 에르하르트·장개석 등 정치지도자들의 과감한 행정규제 완화조치에 의해서였다.
개방화·국제화에 따라 더욱 규제를 풀고 민간참여를 극대화시켜 경쟁력을 키우려면 제도의 개선과 운용이 보조를 맞춰야 한다. 하드웨어는 그럴듯한데 소프트웨어가 엉망이어서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규정은 폐지되었는데도 말단 행정기관에서는 행정지도 명목으로 규제가 사라지지 않고,허가제가 신고제로 바뀌었는데도 창구에서 접수를 받지않는 행정의 임의성이 아직도 지나치게 많다. 소방·건축·위생·공해배출 시설 설치에 관한 각종 행정이 지방자치단체로 이양되면서 지역에 따라 또는 담당 공무원에 따라 운용이 들쭉날쭉인 경우도 허다하다. 일선기관의 자질이 개선되지 않고서는 규제완화가 아무런 소용이 없다. 차라리 중앙에서 일괄처리하는 것이 낫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라면 사태는 심각한 것이다.
시장경제나 민간자율을 강조한 나머지 경쟁의 공정성을 감독해야 할 정부의 기능 약화가 초래돼서는 안된다. 양자가 잘 조화되기 위해서는 단계적이며 실질적인 행정규제 완화조치가 취해져야 하며,그 과정에서 예상되는 정보 독점 또는 유출에 의한 공무원의 부정 또한 철저히 체크되어야 한다. 인·허가사무에 대한 중앙 및 지방의 중첩된 감사는 자칫 지방공무원의 무사안일과 기업의 경제비용 증대로 나타날 우려가 있다. 국제화와 지방화,그리고 행정규제완화 및 일선공무원의 체질변화는 우리가 시급히 풀어야 할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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