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3부] 가을 (8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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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그림=김태헌

이럴 때 나는 어른들이 정말 싫다. 가끔 우리 집에 손님으로 오는 엄마의 친구들은 아주 어려운 용어들을 쓰면서 이 사회가 어디로 가고 있고, 교육의 문제가 어쩌고 정책이 저쩌고 하면서 밤 늦도록 열을 올린다. 그런데 그 엄마 친구 자식들의 반은 이미 중학교 이전에 미국으로 갔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들은 모여서 우리나라의 교육을 걱정한다. 그 사람들이 걱정하는 그 교육 받는 아이들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아니 그건 내가 고민할 문제는 아니니 엄마는 나라의 교육을 걱정하기 전에 그냥 내 마음의 결이라도 좀 헤아려주었으면 좋겠다. 실은 우리가 얼마나 무섭고 우리가 얼마나 우리 스스로의 미래에 대해 겁먹고 있는지 말이다.

물론 우리들 중에 수업시간이 끝나기만 하면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난 공부 안 해도 돼, 우리 엄마가 대학 못 가면 미국 보내준댔어. 그리고 엄마가 그러는데 여자는 얼굴만 예쁘면 된대. 물론 몸도 말이야"라고 말하는 부류들의 아이들이 있기는 하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보면 나도 가끔 이 사회는 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리고 내 주변에는 그렇지 않은 아이들이 훨씬 많다. 전철에서 줄을 잘 서는 것과 길거리에 휴지를 버리지 않는 것이 공부를 잘하는 것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아이가 더 많이 있으며, 팔레스타인이나 관타나모 수용소를 보면서 과연 정의란 무엇인가, 아주 가끔씩이지만 고민하기도 한다. 나는 집을 나와 걸으며 쪼유에게 문자를 보냈다. 잠시 후, 쪼유에게서 답신이 왔다.

-지금 과외 중, 두 시간 후 교신 가능

길을 걷는데 과외선생님과 함께 앉아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을 쪼유의 모습이 떠올랐다. 족집게 과외선생님에게 곧 있을 중간고사의 문제를 받아 풀고 있을 그 아이의 모습이 말이다. 물론 이것은 조금만 정신을 차리고 생각하면 전혀 가당치도 않은 말이지만 -왜냐하면 쪼유는 나보다도 더 공부하기를 싫어하는 아이니까- 나는 갑자기 이 세상에서 혼자 낙오된 듯한 두려움과 서러움을 느꼈다. 엄마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대들었지만, 소위 부끄럽지 않은 대학 정문으로 친구들이 당당히 걸어 나오면 나 혼자 그 학교 버스정류장 나무 뒤에 몸을 숨기고 그들을 피하고 있는 얼토당토않은 영상도 떠올랐다.

다니엘 아저씨는 불 켜진 서점에서 혼자 책을 보고 계셨다. 아저씨의 손에는 늘 시거나 책이 들려져 있었다. 언뜻 표지에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며 화내는 방법' 이라는 제목이 보였다. 내가 들어서는 것을 보자 아저씨는 "어어 위녕!" 하고 활짝 웃었는데 내 표정을 보자 시무룩한 얼굴로 금방 변했다. 그 변하는 모습이 내 표정을 따라 하는 것이라서 나는 나도 모르게 좀 웃고 말았다.

우리는 서점 정원의 작은 탁자에 앉았다. 아저씨는 언제나처럼 녹차를 가져왔다. 보랏빛 수레국화들이 토분에 가득 피어 여름에서 가을로 계절을 밀고 가는 듯 벌써 바람은 까칠하고 건조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아저씨는 읽던 책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 실은 아저씨가 무언가 물으면 "아저씨 저 지금은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아요, 절 이대로 조금만 놔두시겠어요." 이렇게 대답하려고 했었는데 아저씨가 말없이 그냥 책을 읽고 있자 약간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게다가, 엄마가 "너 지금 어딨니? 어서 들어오거라 엄마가 미안해" 하고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하면 응답하지 않으려고도 했는데 전화기마저 조용했다. 그렇게 잠시 앉아 있으려니 엄마에게 그렇게 화가 나던 기분은 금세 어디로 가고, 심지어 약간 심심해지기도 했다. 나는 하는 수없이 말을 꺼냈다.

"아저씨, 내가 왜 이 밤에 여기로 왔는지 물어봐 주실래요?"

아저씨는 읽던 책을 슬그머니 탁자에 올려놓더니 나를 향해 웃었다.

"엄마랑 싸우고 왔어요. 엄마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서 나를 화나게 했거든요. 어떤 때는 글을 써서 너희들 셋 키우는 게 장난인 줄 아니? 뭐 이러면서 용돈 하나 받는 것도 미안하게 만들면서 우리들을 주눅 들게 하더니 오늘은 난데없이 빚을 내서라도 비싼 과외를 받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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