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나는 한국인의 축제/김종석 홍익대교수·경제학(유세현장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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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일요일 오후 수원시 북문옆 장안공원.
아침에 을씨년스러운 겨울비가 많이 내렸지만 유세장은 이미 사회자의 능란한 바람잡기와 청중들의 호응으로 뜨거운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다.
환호하는 군중속에서 혼자 무엇을 메모하고 있는 내 모습을 몇몇 사람들이 다소 의아한 눈초리로 무슨 훼방꾼 보듯 위아래로 훑어 보고 지나간다.
유세장에서는 유세를 열심히 들으며 중요한 내용을 메모하는 것이 가장 모범적인 태도 아닌가. 아니다. 여기는 후보의 공약과 정책을 들으러 오는 장소가 아닌 것이다. 여기는 열성 지지자의 단합대회 장소고,청중은 후보를 응원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인 것이다.
선거가 정책대결이어야 하고 토론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여기서는 유식한 체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어떤 후보가 어떤 정책을 제시하는가,국가경영능력이 있는가,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는가의 문제는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이 사람들에게는 상관이 없어 보인다.
그저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되는 것이지,그 사람의 과거·자질·사생활이 어떻고 하는 것은 자기후보 흠잡자고 하는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다.
평범한 유권자들에게는 외교안보정책이 어떻고,경제정책이 어떻고 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이야기일 뿐이다. 대통령은 그저 국민들 마음편하게 해주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되면 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우리지방 출신이면 더 좋은 것이고….
국가경영은 그밑에 머리 좋은 사람들이 알아서 잘 하지 않겠는가. 뭐,대통령이 모든 분야의 전문가가 되어가지고 미주알 고주알 다 알아야만 하는가. 자기 연설문도 다 남시켜 쓰는 사람들인데.
결국 대통령은 상징인 것이다. 그저 하는 짓이 밉지 않아서 저녁때 TV에 얼굴 나올 때마다 옆집 할아버지 대하듯 마음 편하고 절로 웃음이나 나오게 하면 백점짜리 대통령 아니겠는가.
지금 유세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응원의 축제가 내 눈에는 바로 그 과정으로 보이는 것이다.
후보가 공약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대학의 정원을 자율화해 대학의 문턱을 낮추겠다고 한다. 우레와 같은 환호가 나온다. 언제부터 우리 국민들이 대학 정원을 국가가 관리하는 것에 대해 그렇게 반감을 가졌던가. 대학교수인 나로서는 약간 의아했지만 그건 지금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신용만 있으면 누구나 돈을 빌릴 수 있도록 은행 문턱을 낮추겠다고 한다. 경제학 교수인 나도 그것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나도 환호에 동참키로 한다.
이번에는 위급한 환자가 바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병원문을 낮추겠다고 한다. 나도 더 크게 환호한다.
설마 다른 당 후보라도 여기에는 이론이 없을 것이니 이런 공약들은 이미 국론통일이 이루어진 셈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이런 문턱들은 낮아져야 할 것이고 5년뒤에는 또 다른 문턱들이 더 낮아져야 하겠지만,이런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를 듣고도 다들 흐뭇하기만 한 얼굴들이다.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되지만 좋은 정책이 대통령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되는 것이다. 누가 되든지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대동소이하니까.
갑자기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우산을 하나 둘 펴들면서 분위기가 어수선해진다. 내 뒤의 어떤 여자가 발을 동동 구른다. 『왜 지금 비가 오나. 우리 유세를 망치려고….』 마침 후보가 연설을 끝마친다. 다시 그 여자가 말한다. 유세가 마침 끝나니까 비가 온다고. 참 다행이라고. 사람이란 원래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고 누군가가 그랬다지만 여기 유세장에 모인 지지자들은 분명 그런 사람들이다.
선거유세는 이제 지지자들이 함께 모여 단합을 과시하고 분위기를 돋우는 「응원대회」가 됐다. 대통령이 되겠다는 사람을 그 지지자들이 에워싸고 벌이는 한바탕의 축제요,흥과 신바람의 한마당인 것이다. 또 후보마다 크든 작든 이런 축제마당을 지금 전국 여기저기에서 신나게 벌이고 다닐 것이다.
이것은 서양에서 수입한 제도가 아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한국에서의 유세는 너무나도 한국적인 우리만의 축제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웃음과 눈물과 환호와 감격이 모두 어우러져 있다.
쏟아지는 빗속에 우산을 들고 유세장을 빠져나가는 나의 얼굴에 웃음이 절로 떠오른다.
듣고싶은 이야기를 들어서가 아니었다. 좋은 연극 한편 보고 난 뒤에 떠오르는 그런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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