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그림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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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그림자'-정현종(1939~ )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그림자가 물에 비쳤다.

나는 그 물을 액자에 넣어 마음에 걸어놓았다.

바라볼 때마다 그림자들은 물결에 흔들렸다.

그리고 나는 그림자들보다 더 흔들렸다.



장례식은 이 지상에서 지극한 풍경. 지인들이 물 저쪽에 시인은 이쪽에 서 있다. 순간 그 물이 마음에 들어왔다. 그때부터 실재가 허상이 되고 허상이 실재가 된다. 도치된 액정화면. 현실의 풍경도 내용도 떠나가고 사자처럼 이미지만 남았다. 흔들리는 물만 지금은 있을 뿐. 죽음 밖의 꿈속 '물액자'. 그 '나'는 문득 고인의 저쪽을 그리기 전에 물그림자 속에 흔들리는 현실을 본다. 이 몸이 고인의 저쪽이 된다. 현실과 존재가 꿈에 압류당했다.

<고형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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