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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역교류 사」규명 나선 레바논 인|"처용은 울산에 온 아랍상인"|『신라·서역 교류 사』펴낸 단국대 깐수 교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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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세계역사 속에서 한국은 결코 은둔의 나라가 아닙니다. 한국은 동서문화 교류에 있어 당당치 하나의 주체적 역할을 수행한 열린 나라였지요』라고 주장하는 무함마드 깐수씨(46·레바논인·단국대 사학과 초빙교수)는 여러 면에서 한국인들을 아연실색케 하는 사람이다.
그를 처음 만난 한국인은 그의 완벽한 한국어 구사와 거침없는 매너에 그가 외국인임을 눈치채지 못하기 십상이다.
콧수염을 기르기는 했지만 한국남성의 평균신장과 몸무게를 벗어나지 않는 그의 체구와.「튀지않는」피부색, 평범한 의상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는 못한다. 게다가 고향을 충청도쯤으로 짐작케 하는 구수한 말투와 소탈한 웃음은 그가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게됐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이유들이다.
그 깐수 교수가 최근『신라·서역교류 사』를 출간, 사람들을 한번 다 그게 놀라게 했다.
『신라·서역교류 사』를 하 아랍인에 의해 저술된 한·이슬람교류 사라는 점에 치중해 관심을 가진다면 그것은 한 역사연구가의 진지한 연구를 평가 절하하는 무례한 행위가 될지도 모른다. 그만큼「묵직한」그의 연구 집은 기존의 통설을 뒤집는 획기적인 학설로 학제에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그는『신라·서역교류 사』를 통해 신라 향가에 나오는 처음의 실체규명은 물론 한국불교의 남래설, 실크로드 연장선에서의 신라와 서역간의 교 통로 설정 등에 대해 새 견해를 제시했으며 아랍·무슬림들의 신라 내왕, 혜초의 서역행로 등 기존연구에 있는 오류와 맹점도 새로운 시각으로 짚어 냈다.
『한국의 역사연구는 깊이가 있지만 시야의 범위가 좁은 것이 흠이라고 조심스레 충고하는 깐수 교수는 한국인들조차 한국을「은둔의 나라」로 이직하고 있는 것이 의아하다고 한다. 그가 직접 이집트 국립박물관 등을 뒤져 찾아낸 중세 아랍의 문헌은 한국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일찍부터」, 그리고「활발하게」서역과 교류해 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그동안 중국 혹은 유럽 문헌에 의지해 한국역사를 규명해 온 것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며 유럽사관으로 굴절된 한국 역사의 맹점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아랍의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지바의 저서『제도로 및 제왕국지』(845년)를 비롯한 10여개의 문헌에「신라」라는 국명이 거의 정확한 아랍어 발음으로 기록돼 있으며 12세기 초 이슬람 지리학의 거장 알 이드리시에 의해 제작된 세계지도에 신라가 명기된 것 등 일찌감치 신라·서역간에 활발한 교류가 행해졌음을 입증하는 구체적인 사료들을 제시했다.
또 70여년 간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화랑 또는 호족의 차제·무당·용·이슬람 상인으로 둔갑하며 각인 각 설로 어지러운 처용의 정체에 대해 그는『9세기 당시의 무역항 울산을 통해 상륙했던 이슬람 상인이었다』고 확신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삼국사기』『삼국유사』는 물론 고려·조선시대의 문헌 등 각종 자료를 추출해 검토·고증한 연구의 진지한 결론이다
그는 또『왕오천축국전』을 저술해 널리 알려진 신라시대의 고승 혜초가 지금껏 알려진 것과는 달리 현 아프가니스탄읕 넘어 아라비아에까지 진출했으며 고구려명장 고선지 장군은 비록 유 종의 미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해발 5천m가 넘는 파미르고원을 다섯 번이나 넘나든 위대한 영웅이었다고 밝혔다. 그리고『중국의 제 지술을 이슬람 제국에 전파한 고선 지의 문화사적 업적은 높이 평가되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한낱 어린이들을 위한 전기 인물로만 소개되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라고 덧붙였다
그밖에 한국 불교가 남해 로를 통해 전래되었으며 실크로드의 동 단은 한반도에까지 뻗쳐 있었다는 그의 주장도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는 주제들이다. 그의 방대한 역사연구는 완벽한 아랍어와 한국어는 물론 영어·불어·독일어·일본어·한문까지 능통한 어학실력으로 각종 문헌들을 섭렵할 수 있었던 것이 크게 뒷받침되었다.『신라·서역교류 사』집필에는 무려 6개국어의 문헌이 동원됐다. 편집과정에서 국내에 없는 아랍어 활자는 깐수 교수가 직접 타자로 치고 이를 사진 식자 했고 컴퓨터에 없는 한자가 3백80자나 됐으며 끌까지 만들어 내지 못한 지자는 인쇄소에서 활자를 간신히 조림했다.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하는 연구과정 만큼 힘든 편집은 자그마치 1년6개월이나 걸렸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다국적(?)으로 이끌어진 삶에 대해 『아마도 역마살이 낀 탓 같다』며 웃어 버리는 깐수 교수는 부모가 선교사였던 까닭으로 필리핀에서 태어나 7세까지 그곳에서 성장했고 부모를 일찍 여의고 레바논에 있는 삼촌에 의해 부양돼 베이루트 아랍 대학교에서 학·석사과정을 마쳤다 그후 빈에서의 2년간 체류, 아프리카 튀니지 대 연구원 생활을 거쳐 그는 말레이시아 말레이 대 이슬람아카데미에서 교수로 재적했다.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말레이대에 몸을 담고 있던 84년.「동아시아에로의 이슬람문하 전파사」를 주제로 학위논문을 준비하던 그가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한국 땅에 발을 디딘 것이 지금껏 눌러앉게 된 계기가 됐다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이 그를 유혹했고 그가 이곳에서 학문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준 스승과.「우쿠워」(형제애)로 감싸준 학우들의 끈끈한 정이 그의 손을 잡아끌었다. 최근 귀화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그는『내가 귀화하면「20세기 처용」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며 크게 웃었다.
『앞으로 고려·조선시대의 동서교류 사, 가능하다면 근·현대의 동서교류 사까지도 연구해 보고 싶다』며 넘치는 의욕을 과시하는 깐수 교수는 4년 전에 백년가약을 맺은 아내(윤순희씨·간호사)와 함께 꾸린 가정에선 청소당번을 마다하지 않는 다정다감한 남편이기도 하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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