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3부] 가을 (7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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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그림=김태헌

만일 우리가 아빠가 같은 형제였다면 이럴 때 더 나았을까, 아니면 더 나빴을까, 솔직히 나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도 있다. 우리는 다 아빠가 다르기 때문에 아마도 앞으로도 이렇게 세 번의 슬픔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는 것 말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어린 나이에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 둥빈이 너무나 가여웠다. 어쨌든 집안의 가장 나이 든(?) 남자로서 그 아이가 감당하고 있을 슬픔의 무게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거실로 나오자 서저마가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서저마로서는 좀체 없던 일이었다.

"아줌마 맥주 마셔요?"

내가 묻자 서저마 아줌마는 "응, 너도 한잔 마실래?" 하고 물었다. 가뜩이나 요즘 가슴 속으로 구멍이 뚫리고 바람이 서늘한 가을바람이 지나간다던 서저마 아줌마는 사는 게 뭘까, 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아줌마 곁에 앉았다.

"아줌마는 둥빈 아빠 알아요?"

내가 물었다. 서저마는 대답 대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알지…. 참 잘생기고 델리케이트하고, 몹시 날카로운 구석도 있고 그러면서 한없이 여리고…. 한마디로 예술가였어."

"예술가끼리 살기가 힘들었나봐요. 가끔 아빠를 보면서 같은 작가로서 엄마랑 부부로 산다는 것은 힘들었겠다, 나도 생각했거든요."

아줌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 빈 잔에 술을 더 채워주었다. 그러고는 한참을 생각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가난한 이혼녀였던 네 엄마와 가난한 감독 지망생인 둥빈 아빠가 결혼을 하고 너희 엄마가 갑자기 유명해지기 시작했어. 엄마 자신도 예상치 못했고, 곁에서 보는 내가 놀랄 정도로 그랬지. 세 권의 책은 베스트셀러에 다 오르고, 여기저기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오고, 반대로 둥빈 아빠는 일이 점점 더 풀리지 않았지…. 집을 늘려 갔고 차도 샀어. 소설가에게는 참 오기 힘든 행운이었지…. 그런데 엄마의 얼굴은 늘 어두웠어. 엄마는 가끔 내게 와서 말하곤 했어. 언니, 한집안에서 딱 한 사람만 일이 잘 된다고 한다면, 나 대신 둥빈 아빠가 잘되게 해달라고, 그렇게 해달라고 할 거 같아…. 너 페미니스트 맞아? 내가 웃어넘기면…, 엄마는 혼잣말을 하곤 했지… 만일 일이 반대로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 그 후로도 나 역시, 가끔 생각해보곤 했단다. 일이 반대로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서저마는 생각에 잠긴 듯이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네 엄마 둥빈 아빠와 이혼한다고 했을 때 나 말렸어. 맞아 죽더라도, 그냥 형식적으로라도 결혼은 유지하라고 했지, 남들 모르게 그냥 한집에 있으라고…. 생각해보면 그런 말 한 나도 한심하지만, 어떻게 하겠니? 그 당시에 이미 유명해져버린 네 엄마, 33살 나이에 성 다른 아이 둘 낳고 두 번이나 이혼하는 건 자살보다 더한 거였으니. 친정에서도 친구들도 모두 다 그렇게 말을 한 모양이야. 그런데 네 엄마…, 아무도 만나지 않고 석 달인가를 두문불출하더니 혼자서 그걸 하더라. 그때 네 엄마가 나한테 찾아와서 말했어. 언니, 지금 내 곁에 아무도 없어. 난 앞으로의 일 같은 건 모르겠어. 둥빈이 키워줄 사람 없으니 자살은 못 하겠지. 그런데 이건 아니야. 이렇게 사는 건 삶이 아니야. 난 이미 죽어버린 거니까 더 죽을 수도 없어…. 솔직히 나도 그때 네 엄마를 다는 이해 못 했어. 조금만 남편을 구슬려보라고 상투적으로 달래곤 했으니까. 많이 울었어. 참 많이 울더라."

그날 밤 엄마는 많이 늦게 귀가했다. 엄마는 여느 날과는 달리 둥빈의 방으로 들어가서 오랜 시간 머물렀다가 거실로 나왔다. 서저마 아줌마와 내가 잠이 올 리 없어서 엄마를 보러 거실로 나왔다. 엄마는 탈진한 듯한 얼굴로 거실 소파에 주저앉았다. 엷은 눈물 자욱이 화장한 뺨 위로 번져 있었고 입술은 얇게 씰룩거리고 있었다.

"둥빈이가 자네…. 쟤는 어릴 때부터 잠은 참 잘 자….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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