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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리 야망 발목잡는 포스터의 망령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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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호 04면

클린턴·포스터 부부의 다정한 한 때(1988년) 클린턴 아칸소 주지사 부부(오른쪽)와 빈스 포스터(맨 왼쪽ㆍ변호사) 부부. 그해 힐러리는 미국 100대 변호사 중 한 명으로 선정됐다. 중앙포토

2002년 7월 14일 피츠버그 트리뷴 리뷰라는 미국의 한 보수 신문은 “빈스 포스터가 힐러리로부터 미국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힐러리 클린턴이 집권하는 게 악몽과 같다는 이 신문의 입장을 대변하는 기사였다. 기사 내용은 2004년 대선을 앞둔 민주당이 마땅한 대선 주자를 찾지 못하자 다급한 나머지 힐러리를 후보로 내세울지 모른다는 것, 그러나 힐러리는 포스터와 관련된 스캔들 때문에 결
국엔 대선에 나오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타살의혹·부적절한 관계 루머 단골메뉴로

힐러리는 실제로 2004년 대선에 출마하지 않았다. 지금이나 그때나 유력한 대선 주자인 힐러리의 출마에 ‘어느 정도’ 변수가 되는 포스터는 어떤 인물일까? 힐러리와 포스터 사이에는 과연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45년생으로 힐러리보다 두 살 위인 포스터는 아칸소에 있는 로즈로펌이라는 법률회사에서 힐러리와 함께 근무했다. 로즈로펌은 1820년에 창설된 유서 깊은 법률 회사다. 포스터는 또 클린턴과는 어려서부터 같이 자란 고향 친구였다. 클린턴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포스터는 백악관 법률담당 부보좌관으로 이 부부를 따라간다.

포스터는 아칸소 법대를 수석 졸업하고 아칸소주 변호사 시험도 수석 합격했다. 키 크고, 잘생기고, 진지한 데다 따뜻하기까지 한 포스터였다. 변호사라는 좋은 직업, 미 대통령 부부의 최고 측근… 그런 포스터가 1993년 7월 20일 갑작스럽게 자살한다. 클린턴이 대통령에 취임한 지 6개월 후였다. 자살 원인은 심한 스트레스로 추정됐다. 그는 클린턴 부부의 부동산 투자 스캔들인 화이트워터 사건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뭔가 석연치 않았다. 그 정도의 스트레스는 변호사 시절에도 흔히 겪던 게 아니던가? 당시 제기됐던 의혹들은 “현장이 통상적인 총기 자살 사건의 경우와는 다르다” “사망 6일 후 발견된 28조각의 메모 형식 유서가 조작된 것으로 보인다” “포스터의 상의에선 금발 머리카락과 카펫 섬유 조각이, 내의에서는 정액이 발견됐다” “다른 곳에서 암살된 후 옮겨졌거나, 자살을 했더라도 ‘곤란한’ 곳에서 자살했기 때문에 옮겨졌을 것이다” 등 수십 가지가 있었다.

포스터의 죽음이 타살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뭘까? 우선 클린턴 부부의 비리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있었다는 지적이 있다. 포스터는 “화이트워터는 열어서는 안 되는 벌레 통조림”이라는 메모를 남기기도 했다. 라디오 토크쇼 사회자인 보수주의자 러시 림보는 포스터를 죽인 게 힐러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발언을 여러 번 하기도 했다. 하지만 케네스 스타 특별검사가 이끈 팀을 포함해 세 군데에서 진행된 엄밀한 조사 결과 포스터의 사망은 자살로 결론이 났다. 앤 코울터 같은 유명 보수 논객도 이를 인정했다. 한편 영국의 타임스지는 포스터의 사망 소식을 들은 힐러리가 비명을 지르고 통곡하는 등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백악관 직원의 증언을 빌려 보도했다. 만약 힐러리가 타살의 배후였다면 그렇게까지 연기할 수 있었을까?

자살이라는 결론에도 불구하고 남은 게 또 있었다. 힐러리와 포스터가 부적절한 사이였다는 루머가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해 지금까지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6월 5일 『여성 지도자: 힐러리의 삶』이라는 책이 발간됐다. 워터게이트 사건(1972년)을 특종 보도한 칼 번스타인이 8년간 취재한 내용을 담고 있다. 번스타인에 따르면 포스터는 힐러리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힐러리도 이내 그를 좋아하게 됐다. 그들과 가까웠던 지인들은 대부분 그들이 ‘플라토닉’한 관계였지, 부적절한 관계는 없었다고 증언했다고 한다. 그들은 연인보다 더 가까운 친구 사이였다는 게 골자다. 친구처럼 친밀했던 관계가 백악관에선 차가운 상관과 부하 관계로 변한 게 포스터의 자살을 부추긴 것으로 지적됐다.

번스타인이 펴낸 이 신간에는 힐러리에게 불리한 새로운 내용도 많다. 그에 따르면 클린턴은 1989년 힐러리와 이혼하고, 마릴린 조 젠킨스라는 여자와 결혼하려고 했으나 힐러리가 이혼을 거부했다. 또한 힐러리는 워싱턴 DC 변호사 자격 시험에서 떨어졌는데 이 사실을 친구들에게 30년이나 숨겼다. 이런 내용은 힐러리가 권력에 집착하는 음험한 인물이라는 주장을 지지케 하는 데 이용될 수 있다. 하지만 포스터와 관련된 번스타인의 서술은 그 이전에 나온 보수 진영의 주장들을 희석시키는 면도 있다.
아메리칸 스펙테이터라는 잡지의 1994년 1월 보도 이후 크리스토퍼 앤더슨의 『빌과 힐러리의 결혼생활』(1999), 뉴욕 타임스 매거진 편집장을 지낸 에드워드 클라인의 『힐러리의 진실』(2005) 등을 종합하면 힐러리와 포스터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재구성할 수 있다.

힐러리와 포스터의 관계는 혼외정사 관계였다. 이런 두 사람의 관계는 클린턴이 아칸소주 법무장관을 지내던 시절인 1977년부터 시작됐다. 힐러리가 결혼한 지 2년 정도, 로즈로펌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돼서였다. 힐러리는 친구들이나 측근들에게 둘의 사이를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클린턴 부부를 경호하던 경찰관들의 주장에 따르면 포스터는 클린턴이 집을 비우는 시간을 귀신같이 알고 관저로 왔으며 종종 새벽까지 힐러리와 단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1987년에는 산에 있는 한적한 오두막집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LD 브라운이라는 경찰관에게 힐러리가 이렇게 말한 적도 있다고 한다. “결혼 생활에서 빠진 건 밖에서 찾아야 할 때도 있어요.”

경찰관들의 증언에 따르면 힐러리와 포스터는 종종 뜨거운 포옹을 나누곤 했다. 결국
클린턴 부부는 서로 혼외정사를 묵인하는 사이였으며 함께 권력을 추구하는 동지적 관계였다는 것이다. 한편 힐러리가 FBI 요원을 통해 남편을 뒷조사해보니 클린턴은 8명의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였다는 얘기도 있고, 클린턴이 주지사로 재직시 경호원들을 채홍사로 활용해 마음에 드는 여성들에게 접근하기도 했다고 미국의 일부 보수 언론은 보도해왔다.

이런 내용들이 과연 사실일까? 힐러리는 이러한 주장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반응하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는 주장에 힘을 실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클린턴의 르윈스키 스캔들로 미국이 한창 시끄러울 무렵 힐러리는 “거대한 우익 세력의 음모”가 있다고 주장했다. 음모의 존재 여부에 상관없이 이 스캔들은 사실이었다. 한편 힐러리를 부담스러워하는 반대파들이 힐러리의 뉴욕주 상원의원 당선을 저지하려고 했다. 물론 포스터 관련 부분이 이용됐다. 그러나 힐러리는 당당히 2001년 뉴욕주 상원의원에 취임했다. 뉴욕주 유권자들은 힐러리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제44대 미국 대통령 선거가 2008년 11월 8일 치러진다. 미국민 다수는 민주당 후보를 뽑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차기 대통령에 바짝 다가선 인물은 민주당 내 선두주자인 힐러리다. 그러나 앞으로도 힐러리를 계속 괴롭힐 논란 중에는 그가 적어도 친구로서 그리고 동료로서 사랑했던 포스터가 늘 따라다닐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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