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L기 자료 인도는 “생색용”/김석환 모스크바특파원(취재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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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14일 크렘린에서 있은 KAL기사건 관련자료 전달식은 9년전에 발생했던 이 사건의 의혹을 해소시킬 수 있을 것이란 기대로 큰 관심을 끌었다.
옐친대통령이 직접 전달한 이번 자료는 그러나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에는 미흡하다는 것이 우리측 전문가들의 분석결과다.
자료의 내용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우리측(정부와 대한항공)이 국제민간항공기구(ICAO)와 함께 밝혀낸 내용과 대동소이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까지 우리측이 확보한 자료가 논리적 추론과 전문가들의 의견에 불과해 러시아측의 자료제공으로 확인됐다는 점에서는 성과가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러시아측이 한국에 자료를 제공하면서 보여준 행동은 한국과 한국민에게 결코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러시아측은 『관련자료 일체』라고 주장하면서 『국제사회에 대한 도덕적 책임이행』이라고까지 내세웠다.
그러나 러시아측이 제공한 자료는 원본이 아니었고 조종사와 승무원의 한국어 대화내용도 러시아어로 번역한 것이었다.
외교관례상 이례적으로 대통령이 외국의 실무자에게 사건관계 자료를 직접 전달한 것도 자신들이 마치 선행을 베푸는 것처럼 국제적 주목을 끌기 위한 제스처가 아닌가 보여진다.
옐친대통령 스스로 밝혔듯 자료제공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음은 평가할만하나 이는 KAL기사건 진상조사 작업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사고이후 9년이 지났지만 KAL기사건의 진상은 아직도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다.
따라서 한국측은 진실규명을 위해 블랙박스 자체의 인도를 요구해야 함은 물론이고 러시아측에 구소련이 행한 비인도적 행위에 대한 사과 및 배상요구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양국관계의 신뢰구축은 양국이 당사국으로 개입된 KAL기 격추사건에 대한 진실규명에서 새로 출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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