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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꿈에 아버지 보이면 무조건 따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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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훗날 기록이 보여주고 있듯이 현대의 급성장은 모두 위기를 극복하고 도전으로 얻은 성취였다. 태국·베트남 진출에서도 그랬지만 조선 사업에 뛰어든 후 중동으로 진출할 때는 그야말로 위기와 맞선 최대의 결단이었다.

“내 평생 살아오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내가 직접 사주팔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물어본 적이 없어. 집사람이나 여동생이 재미삼아 물어보고 얘기해준 적은 있어도 말이지. 나는 큰 입찰을 하거나 큰 공사를 하게 되면 반드시 아버지가 꿈에 보여. 그것밖에 없어. 하하항.”

자격미달 딛고 10억 달러 공사 따내

-당시 주베일 산업항 공사는 메인 공사만 10억 달러에 이르는 세계적인 공사였지요. 그때도 입찰할 때 아버님이 꿈에 보였습니까?
“물론 주베일 산업항 때도 아버지 꿈을 꾸고 이건 우리가 먹을 수 있다고 덤빈 거예요. 1974년, 75년도에 10억 달러 공사라고 하면 세계에서 제일 큰 단일공사고 난공사예요. 공사를 발주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도 그렇고 세계적인 건설업계가 바짝 긴장하고 있는 거야. 과연 어떤 회사가 이 공사를 수주할 거냐 해서 말이지. 그런데 우리는 그때만 해도 입찰자격조차 안 되는 거야. 세계 10위권 건설사에 못 들었으니까. 그때는 사우디에서 우리 정부도 불신해 정부 보증서도 인정을 하지 않았어.”

-그런 정도로 대단한 공사였습니까?
“공사도 대단했고 세계 10위권에 드는 건설사 중에서 발주하겠다니까 10위권에도 들지 못하는 회사다 하면 그 회사가 속해 있는 나라도 알 만하다 이거지. 건설회사의 힘이라는 게 그런 거예요. 그러니 입찰 자격은 고사하고 입찰 보증서부터 대한민국 가지고는 안 돼. 신용도가 높은 국가 보증이거나 은행 보증서를 가져가야 귀동냥이라도 하는데, 방법이 있어? 16㎜ 필름에다 시멘트 공장, 자동차 공장, 조선소 같은 걸 죄다 찍어 은행마다 찾아다니며 보증서를 끊어달라고 통사정을 했지. 그런데 하루는 아버지가 꿈에 보이는 거예요. 나는 인생의 한고비를 넘길 때마다 아버지 꿈을 꾸는데 그날 보이더란 말이야. 그러더니 다음날 은행에 가니까 2000만 달러 지급 보증서를 주잖아요. 결국 엄청난 경쟁을 했지만 10억 달러 주베일 공사를 따낸 거예요. 우리가 거기서 벌어들인 달러로 그 당시 국가의 외환 부도를 막은 거예요. 그걸 알아야 돼.”

두 척의 대형 유조선을 진수시키면서 그동안의 모든 우려도 함께 실어 보내고 현대조선을 지켜온 스코 초대 사장도 76년 4월, 임기를 마치고 울산을 떠났다. 그가 떠날 때 정 회장은 그에게 “현대조선이 보고 싶어 오겠다고 한다면 언제라도 항공권을 포함해 모든 편리를 제공하고 환영하겠다”며 치하했다. 물론 현대조선의 발전을 자신 있게 보여주겠다는 뜻도 있었을 것이다.

스코 사장이 떠나면서 비로소 현대맨으로 체제를 새롭게 정비했다. 사실상 이때까지는 이름만 한국의 현대조선소였지 끌고 가는 선장이 외국인이라 마치 혼혈아를 키우듯 조선소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음을 숨길 수 없었다.

76년 8월, 정 회장은 늘 ‘왕상무’로 불렀던 김영주 부사장을 총괄사장으로 임명하고 신규 사업 담당 사장에는 정문도 부사장을 선임했다. 건설에서부터 한솥밥으로 배를 채웠던 현대맨들로 틀이 구성되면서 활력이 넘쳤다. 게다가 창업주의 매제라는 보이지 않는 힘이 뒷받침돼서인지 ‘김영주 체제’는 많은 변화를 몰고 왔다.

-회장님이 사실상 현대조선소 첫 사장이 되신 것 아닙니까.
“결국 구조적인 어려움에 봉착했습니다. 실전에서 뛰어본 팀들이 ‘단순히 배를 건조하는 실력만 가지고는 어렵다’고 보고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엔진·전기·기계 등 모든 것이 우리 기술 능력으로 맞설 정도가 안 되면 경쟁이 어렵다는 거예요. 듣고 보니 맞는 말이야.”

정 회장은 김영주 사장의 건의를 받아들여 78년 2월, 현대조선을 현대중공업으로 상호를 변경하고 중공업 체제 정착을 시도한다. 이때부터 현대중공업은 새로운 시동을 걸기 시작한다. 그동안 경영을 맡아 온 김영주 사장을 현대엔진 사장으로 보내고 78년 10월 이춘림 사장(전 현대중공업 회장) 체제를 출범시켰다.

“신군부에 1, 2등 회사만 희생”

이 사장은 현대가(家)의 사람은 아니지만 그 이상으로 현대가와 동거우락(同居憂樂)해온 인물이었다. 실제로 친동생들과 같이 뒹굴고 닭싸움도 했던 그런 사이였다. 그에 대한 신임이 얼마나 두터웠던지 정 회장은 그에 대해 “이 회장은 전공이 없어. 뭐든지 맡기면 다 잘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이 사장은 무서운 사람이었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력이 무서운 게 아니라 고객에 대한 신용을 지키라고 강조하는 것이 해고를 시키는 것보다 무서웠다고 했다.

“조선 산업은 해외 의존도가 80% 이상이기 때문에 신용을 잃으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 아닙니까. 우리 고객은 선주인데, 납기를 준수하면서 단 하루라도 공기를 단축해주고, 거기다가 품질까지 만족스럽게 해주면 그보다 더 좋은 선물이 어디 있겠어요. 만족이 곧 신용이거든. 우리 직원들이 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을 거예요. 막 조졌거든. 하하하.”(이춘림)

그러나 79년부터 몰아닥친 2차 오일 쇼크는 또다시 최악의 위기를 몰고 왔다. 정 회장도 그 무렵은 악몽이라고 했다. 여기에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터지면서 사회적 혼란이 극에 달했다. 일부 선주가 계약을 취소하겠다고 통보하기도 했다.

-짐작이 됩니다. 그러고서도 또 신군부 때문에 몹시 고초를 겪지 않았습니까.
“세계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산업을 그때 그 인간들이 여러 개 조져놨어! 어떻게 해서 일궈놓은 산업인데. 정치물이 들어간 군인들이 뭘 안다고 통폐합이니 중화학 투자 조정이니, 가소로워서 말이지. (확)나는 평생을 현장에서 살아온 사람이야! 평생 산업 현장을 하루도 떠나본 적이 없어! 통폐합당하고 기업을 빼앗긴 사주들 중에 어느 누가 저들보다 못한 사람이 있어? 그런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어? 누가 누구를 치는 거야? 그동안 전부 잘해온 사람, 전부 1, 2등 하고 죄다 기업을 성공시킨 사람들만 골라서 친 거 아니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부도내고 쓰러질 기업을 조정하고 없애고 했다면 모르겠어, 잘하고 있는 기업을 그렇게 하는 나라가 세상에 어디 있어. 더구나 그렇게 치면, 당하는 기업들은 평생 고생해 놓고 국가에 해악을 끼친 몹쓸 기업처럼 인식되는 거 아니야? 정말 그런 취급 받아야 할 기업들이야? 어떤 기업인, 어떤 기업들이 당했는지 보란 말이야. 통폐합으로 희생된 건 전부 1, 2등짜리야! 에이, 부아가 치밀어서 더 얘기 못하겠어.”

위기는 계속됐다. 현대중공업은 78년부터 사업본부를 축소하고 기관차와 엔진, 중전기를 별도법인으로 독립시켰다. 79년에는 조선사업본부·플랜트사업본부·관리본부만 남기면서 나름대로 체질 강화를 시도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장기적으로 보면 경쟁력 약화를 초래하는 요인이 됐다.

70% 이상이 조선사업본부의 실적에 좌우되는 구조에서 경기 변동에 대한 적응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면 취약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수 기반이 없는데 해외 조선시장이 얼어붙으면 생존할 수 있는 길을 찾기가 어렵게 돼 있었다는 얘기다.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현대중공업 골리앗 크레인.

그래도 현대는 끈기와 저력이 있었다. 모두가 1등급 인재들이라고 할 만큼 유능했던 박재면·박영욱·김형벽·이정일·정태구·이현태·구영회·최병권·지주현씨 등 중간 간부들과 작업반장들까지 모여 위기를 기회로 만들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다.

9년여 동안 중공업을 이끈 이춘림 사장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능력을 다 발휘했다. 결과는 만족이었다. 81년 결산이 608억원이나 흑자로 나온 것이다. 그리고 선박 수주액도 9억8000만 달러를 올려 비로소 차관을 쓰지 않고 10억 달러 수주를 달성하는 원년을 기록한 것이다.

“참 운이 따라줬어요. 세계 1등이다, 2등이다 하는 게 영원한 것도 아니고 특별한 것도 아니긴 하지만 현대중공업이 설립 10여 년 만에 잠깐이라도 세계 1위 조선회사로 부상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게 83년인데, 그때 선가(船價)가 바닥을 쳤다고 판단한 선주들이 비록 3만~4만t 소형 화물선이지만 대량으로 발주를 했거든? 말하자면 투기성 발주지요. 선가가 틀림없이 오른다고 본 거지. 그해에 무려 125척 440만t을 발주했으니 그런 유례가 없었지요. 세계 조선시장이 흥분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우리가 운이 참 좋았다는 것이, 그때까지는 발주가 나오면 거의 일본 조선사들이 독식하다시피 했어요. 근데 한꺼번에 물량이 쏟아져 나오니까 일본 조선사들 도크가 부족한 겁니다. 수주를 할 수가 없는 거야. 그러니까 그게 전부 우리한테 몰리는 거예요.”(이춘림)

그러나 그 기쁨은 잠시였다. 6·29 선언 후 87년부터 불어닥친 노사분규는 급기야 선가 상승을 가져왔고 원화 절상마저 겹쳐 조선 산업의 경쟁력을 곤두박질치게 했다. 그해 현대중공업은 7월부터 9월까지 두 달 동안이나 혹독한 노사분규를 겪었다. 이런 변화는 급기야 새로운 환경에 맞는 경영과 혁신적인 체제로 재정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때 등장한 인물이 정몽준 회장이다. 미국 존스홉킨스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노사분규가 절정을 향해 치닫던 그해 8월에 경영 일선으로 돌아왔고 ‘지긋지긋했다’는 밤샘 협상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 11월, 회장에 취임했다.

몽준 회장의 취임은 두 가지 면에서 시험대에 오른 셈이었다. 변화에 대한 순발력이 있느냐, 또 하나는 불황이 장기화되는 암울한 조선시장에서 새로운 시대에 대비해 선사들 간의 출혈경쟁을 잠재우고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조선과 해양·플랜트 등 중공업 전반의 불황 국면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지, 해법이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몽준 회장의 과감한 투자 결정

결과는 이상할 정도로 운이 따라주었고, 사업본부별 체계도 일원화시켜 순발력을 확산하는 시스템 구축도 성공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몽준 회장이 배운 것은 정 회장의 미래를 보는 안목이었다. 조선업계가 불황이었던 75년에 미포조선 설립을 밀어붙여 일본으로 갈 물량을 대거 흡수했듯이 훗날이지만 몽준 회장은 중역들이 모두 반대하는 중에도 8도크와 9도크 건설에 들어가도록 지시했다. 그것이 미래를 보는 안목이었다.

더구나 정 회장이 대선 출마 실패로 좌절에 빠져있었음을 감안하면 몽준 회장의 오기에 가까운 집념을 엿보게 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창업주 정 회장의 안목과 불황을 염두에 두지 않은 과감한 투자 결정은 현대중공업이 세계 1위의 조선소로 급부상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94년 이전까지만 해도 1조6000억원에 불과했던 조선사업본부의 매출이 9도크까지 완공된 96년부터는 2조원이 넘는 성과를 냈고 올해는 5조7000억원 달성을 목표로 삼고 있을 만큼 끝없이 성장해 가고 있다.

갈매기만 찾아들던 황무지를 세계의 부호들이 찾아오는 최대의 조선소로 바꾸어 놓은 정 회장이 새삼 그리워지는 시대다. <끝>

이호_객원기자=작가 (leeh52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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