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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일에 생각하는 국가와 민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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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최근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라는 국기에 대한 맹세문의 존폐를 둘러싼 논란이 일고 있다.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을 요구하는 문구는 군부독재 시대의 잔재이므로 민주화시대에 맞게 수정돼야 한다는 주장과, 개인주의가 팽배한 시점에서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존속시켜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선다.

프랑스 종교학자 르낭에 따르면 "민족은 이미 치러진 희생과 여전히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 희생의 욕구에 의해 구성된 거대한 결속"이다. 그는 민족이란 지금 살아 있는 자뿐 아니라 죽은 자가 함께 공존하는 영적인 가족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나는 유한한 존재다. 덧없이 사라지는 유한자(有限者)가 존재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영원한 것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이렇게 영원한 초자연적 존재와 관계를 맺는 의례(儀禮)행위라는 뜻의 라틴어 '렐리지오(religio)'로부터 종교(religion)라는 말이 나왔다. 영원한 것은 위대해야 하며, 위대한 것은 영원해야 한다. 나는 죽어 사라져도 국가와 민족은 영원하기 때문에 그 영원성을 위해 희생을 한 순국영령은 국가의 신으로 추앙된다. 야스쿠니 신사로 상징되는 일본 신도(神道)가 바로 이 같은 국가종교다. 얼마 전 세계 10대 종교로 발표된 북한 주체사상도 똑같은 국가종교다. 단군과 김일성을 혈통적으로 연결시키는 김일성민족론은 1990년대 현실사회주의 붕괴 이후에도 북한 체제를 존속시키는 영적인 힘으로 작동한다.

현대 물리학을 대표하는 양자역학에 따르면 만물의 근원은 정보다. 정보의 영어 단어인 '인포메이션(information)'은 형태(form)를 주입(infusion)한다는 의미다. 현대 물리학자들은 우리가 알 수 있는 실재는 사물 자체가 아니라 그 관계들뿐이고, 그 관계가 디지털 코드인 0과 1의 조합 형태로 정식화됨으로써 정보로 유통된다.

나는 유한하지만 관계는 영원하다. 내가 죽은 후에도 나와 관계를 맺은 가족과 국가는 존속한다. 가족과 국가라는 관계의 형태로 죽은 후의 나는 존재할 수 있다. 근대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위대함은 그 관계를 개인의 의지로 정의했다는 점이다. 르낭의 정의대로 민족이란 개인이 날마다 자기 삶의 관계를 결정하는 것처럼 '매일 매일의 국민투표'로 성립하는 관계다. 그 관계가 일방적일 때 국가와 민족은 더 이상 위대한 존재가 아니다.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크로퍼드 별장 앞에서 혼자 이라크전 반대시위를 벌여 전국적인 반전운동의 불길을 지폈던 '반전 엄마' 신디 시핸이 지난달 28일 미국 현충일인 메모리얼 데이(memorial day)에 국가와 관계를 청산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는 "미국이여 안녕… 너는 내가 사랑했던 조국이 아니다. 국가가 스스로 원하지 않는다면 내가 얼마나 희생하더라도 (내가 사랑했던) 조국으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네게 달려 있다"고 글을 맺었다.

존 F 케네디는 "국가가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당신이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위대한 국가가 잘못된 지도자를 만나 관계를 청산해야 하는 지경에 이른다면 일방적 충성을 강요하는 '국기에 대한 맹세'는 허식적인 말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국가는 영원해야 한다.

올해 말 대선에서 우리 국가를 이끌고 나갈 지도자를 국민은 결정한다. 이는 유한한 내가 무한한 국가와의 관계를 결정하는 일이다. 나 개인이나 지역의 덧없는 이해관계에 따라서가 아니라 내가 죽은 후에도 존재할 위대한 국가 대한민국을 이끌 사람이 누군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고 국민은 선택을 해야 한다.

김기봉 경기대 교수 ·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