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평] 한국정치, 아직 희망은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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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새 정부가 출범한 지 1년이 지난 지금 한국 정치를 바라보는 국민의 심정은 참담하다는 것 외에 달리 표현할 말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민생 현안을 뒤로하고 연일 벌어지는 정치권의 이전투구와 정치인들의 부패 소식은 국민을 신문과 TV에서 멀찌감치 물러나 앉게 한다. 단순한 정치의 위기를 넘어 국가의 위기라고까지 우려되는 현재의 상황은 해가 바뀌어도 별로 달라질 것이 없어 보인다.

*** 패러다임 전환기에 겪는 현상들

돌이켜보면 우리 정치 현실은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한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권위주의 정권을 몰락시켰던 4.19 혁명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등장으로 미완의 혁명에 그쳤고, 18년간의 군사정권은 5.18 광주사태를 통해 전두환 군사정권을 재생산했다.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을 통해 얻어낸 직선제는 3金정치라는 또 다른 권위주의 앞에서 그 의미를 상실해 갔다. 뿐만 아니라 좁디 좁은 땅덩어리는 남북으로 나뉜 것도 모자라 동서로 갈라졌으며, 구세대 정치의 완고함 앞에서 새로운 정치 변화는 늘 배제돼 왔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대선 때 도입된 국민경선제도는 한국 정치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환으로 평가됐고, 그 시도만으로도 국민을 흥분케 했다. 여야 공히 시도된 국민경선은 새로 들어설 정부가 기존의 권위주의 정치문화에서 벗어나 국민의 선호에 끊임없이 반응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함으로써 새 시대 정치의 장을 여는 듯 보였다. 그러나 1년여가 지난 지금 여야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능력하고 무책임한 정치체로 평가되고 있다.

과연 한국 정치는 과거처럼 미래에도 희망이 없는 것일까? 비록 혼돈 속에서 헤매고 있는 현재의 정치상황에서 다소 역설적으로 들릴지 모르나 한국 정치에서는 아직 희망을 찾을 수 있다. 무능력한 여당과 무책임한 야당, 여야를 불문하고 일어나고 있는 분당과 분열의 양상은 기본적으로 종파적이고 당리당략적 차원에서 비롯됐다는 점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뒤집어보면 이는 오랫동안 정체돼 왔던 한국 정치가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수십년을 끌어왔던 권위주의적 군사정권과 리더의 개인적 가치 속에서 추종자들의 동기를 유발해 왔던 3金시대의 청산이라는 염원 달성의 끝자락에서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갈등과 진통이기 때문이다. 혼란과 갈등으로 암담해 보이기만 하는 한국 정치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등장은 그 패러다임이 설득력을 얻고 정당화되기까지 많은 고통과 불편함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의심의 여지없이 관행처럼 여겨온 패러다임에 대한 도전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며, 새로운 대안을 내놓는 작업은 더욱 어렵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이 반드시 낫다는 보장도 없는 상황에서 평생을 신봉해 오던 기존의 패러다임을 결사적으로 사수하는 것 또한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패러다임 전환기에 겪는 이러한 갈등은 위기가 아닌 도전의 과정인 것이다.

어떤 정치학자는 냉전이 끝난 후 증가하는 불확실한 국제정세를 두고 언젠가 사람들이 냉전시대를 다시 그리워할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우리가 겪고 있는 당장의 혼란과 갈등도 과거 권위주의 시절의 강요된 안정에 대해 그리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무덤 속에 자고 있는 권위주의의 사체가 이 나라 정치를 다시 책임지지 못함은 자명한 사실이다.

*** 정치인과 국민이 고통 분담을

우리는 지난 수십년간 권위주의적 정치문화에 익숙해져 왔으며, 지금도 그 유산을 떠안고 있다. 이를 제거하는 노력은 정치인과 국민 모두의 몫이며, 새 시대로의 전환을 위한 고통과 불편함 역시 정치인과 국민이 공히 나눠가져야 한다. 현재의 갈등과 혼란이 구시대 정치문화를 청산하고 새 시대 새 부대에 희망을 담기 위한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이해될 때 우리의 정치는 희망이 있다. 그리고 새로운 시도의 완성을 위한 정치인과 국민의 각고의 노력이 동반된다면 지금의 갈등과 혼란은 화합과 안정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미래를 두고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이승철 한양대 국제학대학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