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년 비밀결사 '靑幇' 최고의 두령 杜月笙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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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 26면

1930년대 상하이 기차역에 나온 두웨성(오른쪽 둘째). 가운데 는 상하이 경비총사령관 양후. 사진=김명호 제

중국 역사와 함께해온 비밀결사의 깊은 뿌리와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민족 정권이 들어설 때마다 한족 부흥운동의 배후에는 그들이 있었고, 아주 복잡한 성격의 역사적 인물들을 배출했다. 가로회(哥老會) 지파인 청방(靑幇)은 17세기 초 만주족이 청(淸)을 건국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해 3세기 후인 1920∼30년대엔 상하이를 지배하다시피 했다. 이 시기 청방 두령이 두웨성(杜月笙ㆍ1888∼1951)이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⑫

그는 아편 운반과 판매를 통해 세를 키웠다. 최대 도박장 궁싱(公興)구락부도 그의 소유였다. 14세 때 먹고살기 위해 상하이로 나와 과일가게 종업원으로 시작, 23년 만에 황진룽(黃金榮), 장샤오린(張嘯林)과 함께 트로이카를 형성한 두웨성은 목욕탕이나 오락장을 운영하던 황이나 장과는 격이 달랐다. 조직과 기획에 뛰어났고, 문화인이나 지식인과 친분이 두터웠다. 루징스(陸京士)는 두의 전기를 쓰며 그의 충실한 제자로 기억해주기를 소망했다. 당대 국학의 최고봉 장타이옌(章太炎)은 온갖 고전을 뒤져 새 이름과 호를 지어주며 두의 고향 푸둥(浦東)에 사당(杜氏祀堂)을 지을 것을 고집했고, 명변호사 친롄쿠이(秦聯奎)는 도박으로 탕진한 거금을 돌려받은 후 두의 영원한 부하가 됐다.

대표적 신문도 두의 계열사와 같았다. 대공보(大公報) 총편집 쉬서우청(徐壽成)은 두의 사후 평전을 집필, 그를 그리면서 남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에게 선생(先生)이라는 칭호를 붙였고 그의 제자나 학생으로 자처했다. 그가 언론계 인사들을 상대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데 쓰라고 푼 돈이 연 200만 은원(銀元)이었다. 유학(儒學)으로 무장된 폭력이 가장 두렵다는 루쉰의 말은 그를 지칭한 것이었다.
1927년 3월 저우언라이가 지휘하는 상하이총공회 노동자들이 조계(租界)를 제외한 지역을 점령했을 때 중화공진회(中華公進會)를 조직해 무자비하게 해산시키고, 300여 명의 사망자와 5000여 명의 행방불명자를 낳은 4ㆍ12 사건의 핵심 인물도 그였다. 또 국공 합작 파열과 장제스의 국민정부 수립 등 역사적 사건에 관여치 않은 게 없었다. 그는 300년 청방 역사상 최고의 인물이었고 상하이의 황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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