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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시시각각

'눈물의 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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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여보! 오늘 당신이 가신 지 4개월에 되었네요. 아침부터 머리 감고 예쁜 옷 입고 당신이 사주신 호박 목걸이 걸고 당신에게 조금이라도 더 예쁘게 보이고 싶어서, 종철이도 자고 있는데 혼자 일찍 왔어요.'

'오늘은 비가 오는구나. 용미리 이곳을 지날 때면 가슴이 저리고 목이 메어 오는데… 이곳은 평화롭고 조용해 보인다. 자주 오지 못해서 미안하다, 봉길아.'

'아빠, 전 다솜이에요. 별나라에서 잘 계시죠? 이제 저는 여섯 살이에요. 아빠, 사랑해요.'

'할머니, 안녕하세요? 엄마가 할머니는 나비가 되셨대요. 할머니는 제일 예쁜 나비였으면 좋겠어요. 할머니, 사랑해요.'

'이 사람아, 그리워서 왔다 가네. 나도 자네 뒤를 따라가겠지. 총알이 빗발치던 전선에서도 탄피를 줍던 용감한 자네도 한 줌의 재로 변해 이곳에 잠들었네. 편히 잠드소서.'

어수선한 속세에서 복닥거리며 때로 미워하고 다투었을 사람들도 고인에게 쓰는 편지지 앞에서는 모두 착하고 경건해진다. 서로 사랑한다. 덕분에 그들의 진실한 마음을 엮은 책을 대하는 독자의 마음도 순해진다. 진실의 힘이다. 그래서일까. 어떤 사업가는 일 년에 두어 번 벽제 화장장(서울시립 승화원)을 찾아 자기와 관계없는 이들이 각자 사랑하던 사람과 이별하는 모습을 한 시간가량 지켜보다 돌아선다고 했다. 그래서 남 해코지 안 하고 열심히 세상을 헤쳐 나갈 힘을 얻는다고 했다.

어떤 책이 '가끔 꺼내 보는 책' 반열에 들려면 몇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 우선 보편성이 있어야 한다. 생로병사 같은 근본적인 주제를 다루되 쉬우면서도 깊이가 있어야 한다. 다면성.함축성도 필요하다. 그래야 처지가 다른 독자가 읽어도, 몇 년 전 읽은 것을 다시 읽어도 매번 가슴을 친다. 글이 소박하고 평이하다면 금상첨화다. 그런 책으로 당장 떠오르는 것이 성경이나 불경류다. '채근담'이나 당시(唐詩).이솝우화.명상록들도 좋을 것이다. 성경과 불경이 쉽다고 하면 그야말로 불경(不敬)이지만, 굳이 신도가 아니라도 가끔 꺼내 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게 가장 편하고 만만한 책은 역시 '눈물의 편지'다. 2000년 초판이 나온 이 책은 제2권('새가 되소서 하늘을 나소서')과 어린이용인 제3권('하늘나라 우체국')도 나왔다. 제2권은 대만에서도 번역 출간됐다고 한다.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스테디셀러 축에는 낄 만하다.

얼핏 무겁고 칙칙해 보이는 고인에게 보내는 편지가 감동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공을 초월한 울림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조선시대에는 '눈물의 편지'가 어엿한 문학장르로 자리 잡고 있었다. 연암 박지원은 먼저 간 누나에게 바친 묘지명에서 상여를 전송하던 날의 심정을 '강 위 먼 산은 검푸른 것이 마치 누님의 쪽진 머리 같고, 강물 빛은 누님의 화장거울 같고,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다'고 표현했다. 추사 김정희는 부인을 보낸 뒤 '내세에는 나는 죽고 당신은 천 리 밖에 살아남아 당신으로 하여금 이 슬픔을 맛보게 하리라'는 절규 같은 시를 남겼다.

고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사실은 내가 나에게 보내는 편지다. 유한한 삶이니 착하고 보람 있게 살라고, 비루하게 악다구니나 쓰며 살지 말라고 스스로 타이르는 편지다. 나를 위해 죽어간 이들도 많다고 깨우치는 글이기도 하다. 매년 5월엔 망월동 묘비에 가슴이 먹먹해지다 6월에 들어서면 반세기도 더 지난 전쟁의 상처가 생생히 헤집어진다. 며칠 있으면 현충일이다. 오뉴월 날씨가 대책 없이 찬란한 것은 먼저 간 이들 덕분임에 틀림없다.

노재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