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흑인이 … 벽을 뚫고 달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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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백인, 남성, 그리고 중산층 이상'.

유럽과 미국에 기반을 둔 모터스포츠의 오래된 카테고리다. 이 때문에 모터스포츠는 종종 '가진 자의 문화'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 벽은 쉽게 허물어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육중했던 벽이 조금씩 균열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바로 걸출한 여성 드라이버 대니카 패트릭(25.미국.(左))과 흑인 최초의 포뮬러 원(F1) 드라이버 루이스 해밀턴(22.영국.(右)) 때문이다.

27일(한국시간)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열린 인디500 레이스에 출전한 패트릭은 남성 드라이버에 뒤지지 않는 실력을 자랑한다. 이날 출전한 33대 중 여덟번째로 결승점을 통과했지만 한때 2위까지 치고 올라가는 저력을 보여줬다. 26일 열린 F1 모나코 그랑프리에서는 해밀턴이 2위를 차지했다. 그는 쟁쟁한 스타들을 제치고 올 시즌 선두를 달리고 있다.

▶섹시한, 그러나 강력한 패트릭

1m58cm, 45kg. 작은 체구 패트릭이 미국 여성 스포츠의 새로운 이정표를 만들고 있다.

10세 때부터 운전대를 잡은 패트릭은 2004년 영국에서 열린 포뮬러3 대회에서 2위에 오르며 파란을 일으켰고, 2005년부터 인디 시리즈에 데뷔해 꾸준한 성적을 내고 있다. 스포츠일러스트레이티드(SI)는 4월 '세계를 움직이는 여성 스포츠 스타 27명'에 패트릭을 포함시켰다. 스포츠 부문만이 아니다. 한국의 바이올리니스트 장영주가 포함돼 화제가 됐던 '차세대 여성 리더 20인'(2006년 뉴스위크 발표)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부드럽지만 또렷한 얼굴 윤곽, 깊고 큰 눈, 균형 잡힌 몸매 덕에 그는 '섹시 심벌'로도 통한다. 그래서 일부 칼럼니스트들은 "여성이라는 특수함, 곱상한 외모 덕에 실력 이상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고 평한다. 그러나 이런 비판이 나올 때마다 패트릭은 "나는 바지보다 치마를 좋아하고 쇼핑을 즐긴다. 나는 내가 섹시하다고 생각한다. 남성을 이기려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목표를 이루려 도전하는 것일 뿐"이라고 당당히 말한다.

▶검은 황제의 탄생, 해밀턴

해밀턴의 할아버지는 1950년 카리브해의 작은 섬 그레나다를 떠나 영국에 정착했다. 철도 노동자 집안에서 자란 이민 3세 해밀턴이 유럽을 흔들어놓고 있다. 역대 신인 중 가장 뛰어난 활약을 펼치고 있는 해밀턴은 'F1의 타이거 우즈'라 불린다. 백인 중심의 골프를 평정한 우즈 처럼 파괴력을 지녔다는 의미다.

F1은 오래도록 흑인 드라이버의 탄생을 기다려 왔다. 우즈를 계기로 서구 사회는 '백인 주류 스포츠에서의 흑인 스타'가 갖는 파괴력에 눈을 떴다. F1 2007 시즌(17개 대회)은 모나코 그랑프리까지 다섯 번 대회가 열렸다. 해밀턴은 다섯 번 모두 포디엄(3위 이상 입상)에 올랐다. F1은 지난해 은퇴한 '황제' 미하엘 슈마허(38.독일)를 잇는 수퍼스타를 찾고 있다. 외모와 독특함, 그리고 실력까지 겸비한 해밀턴이 '검은 황제' 대관식을 기다리고 있다.

강인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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