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돋보기] '가벼운 사고'도 그냥 가면 뺑소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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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사소한 접촉사고라고 판단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현장을 떠났다면…'.

피해자가 있는 상황이라면 뺑소니(도주차량) 혐의를 피하기 어렵게 된다. 사고를 낸 뒤 차를 세우지 않고 현장을 떠난 운전자가 법원에서 구제된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법원은 뺑소니 혐의에 대한 판결을 내릴 때 ▶피해자에 대한 구호 조치 여부 ▶가해자의 신원 확인 여부 ▶부상 정도 등을 고려한다. 법원행정처 배현태 판사는 27일 "뺑소니범으로 몰리지 않으려면 반드시 차를 세우고 피해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뺑소니 혐의로 기소된 사람은 7600여 명에 달했다.

◆ "구호 조치 인정되면…무죄"=교통사고를 낸 A씨는 차에서 내려 피해자와 말다툼을 벌였다. 누가 잘못했는지를 놓고 실랑이를 벌이다 격분한 A씨는 함께 있던 아내에게 "당신이 알아서 처리해라"며 현장을 떠나버렸다. 아내는 사후 처리를 했다. A씨는 뺑소니범일까. 대법원의 판단은 무죄였다. "피해자를 구호하지 않고 달아난 것으로 볼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대법원은 승용차의 사이드 미러에 행인이 부딪힌 사실을 알고도 현장을 떠나 뺑소니 혐의로 기소된 강모(31)씨에 대해 유죄취지의 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 2심 법원은 "피해자가 병원에 뒤늦게 가는 등 구호의 필요성이 없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차량과 사람의 충돌이 있었다면 피해자를 구호할 필요성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며 뺑소니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다.

◆ "신원 안 밝히면 … 유죄"=가해자가 피해자를 병원까지 옮겨줬다고 해서 뺑소니 혐의가 무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법원은 피해자를 병원에 이송했더라도 경찰의 수사를 통해 가해자가 밝혀졌다면 뺑소니 혐의가 유죄라고 판시했다. "사고를 낸 사람이 누구인지 확정할 수 없는 상태를 초래했다면 도주 의사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는 것. 반면 대법원은 가해자가 병원 측에 사고를 낸 자신의 차량 번호를 알려주고 현장을 떠난 경우엔 무죄를 선고했다.

◆ "부상 가벼워도 사후 처리 철저히"=대법원은 최근 피해자의 부상이 매우 가볍고, 사고 운전자가 정차를 해 피해자와 말싸움을 벌이다가 현장을 떠난 경우에 뺑소니 혐의를 무죄로 선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대법원 관계자는 "수사 기관에 불려가 조사받기 이전 사고 후 조치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말했다. 사고를 낸 뒤에는 ▶일단 정차하고 ▶피해 상황과 피해자를 살피고 ▶피해자의 동행 요구에 반드시 응하며 ▶피해자와 담당 경찰관에게 연락처를 알리는 등 사후 처리에 만전을 기하라는 것이다.

김승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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