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년후 8월9일 바로 그날/손기정옹 “내 예감이 맞았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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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마라톤 「금」에 여한없는 눈물
노마라토너는 마침내 56년간을 참고 참아왔던 울음을 터뜨렸다. 벌떡 일어선 수만 관중들의 환호성에 파붇혀 잘 보이지도,잘 들리지도 않았으나 선두로 결승 테이프를 끊은 선수는 분명히 자랑스런 후배 황영조였다. 생각 같아서는 빨리 황 선수를 끌어안고 싶었지만 너무도 벅찬 감격에 몸이 얼른 말을 듣지 않았다. 관중석 한 모통이에 앉아 주름진 얼굴을 덜덜 떨리는 두손에 파묻고 그저 뜨거운 눈물만 펑펑 쏟을 뿐.
『내 예감이 맞았어. 이제는 마음놓고 눈을 감을 수 있어….』
중앙일보와의 인터뷰(5월23일자)에서 금메달 획득을 예견했던 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옹(80)은 이렇게 눈물로 맞았다. 나라 잃은 설움에 복받쳐 오른 눈물이 아니라 감격과 환희의 눈물이기에 아무리 울어도 좋았다.
『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왠지 예감이 이상했어. 꼭 금메달을 딸 것 같더구만. 미신같지만 이번 올림픽 마라톤은 여러면에서 36년 베를린올림픽 당시와 유사한 점이 많아요. 개최일자도 8월9일로 똑같고 30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속에 치러진 것도 그렇고….』
손옹은 꼭 이것때문에 우승을 예감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최근 우리나라 마라톤이 2∼3년동안 대회때마다 한국 최고기록이 경신되는 등 엄청난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었지요. 또 우리 선수들의 기록(2시간8∼9분대)이라면 어떤 대회에서든 우승권에 들 수 있는 실력이지요. 게다가 날씨가 덥고 막판 코스가 급경사로 되어 있어 평소기록보다 체력·정신력이 큰 변수로 작용,기대해봄직 했지.』
손옹은 곧이어 벌어진 마라톤 시상식을 보며 「참 묘한 일」이라며 상념에 잠겼다. 태극기와 함께 일장기(은메달)·독일국기(동메달)가 올라가는 것이 36년 베를린올림픽 당시 상황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한국인」이 「베를린」에선 「일장기」를 달았었기 때문.
『그때 시상대에 오르니 참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더군요. 개인적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기뻤지만 일장기가 게양되는 것을 보니 「이건 또다른 매국행위가 아닌가」싶어 슬프고…. 귀국후에는 또 어땠어. 일장기를 지운 신문 사진 때문에 소동이 빚어지고…. 지금 선수들이야 참 행복하지.』<바르셀로나=특별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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