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침몰해도 난 뛰어내릴 권리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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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사진) 보건복지부 장관은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경호실장'으로 불린다. 노 대통령보다 정치엔 뒤늦게 합류했지만 코드가 일치하고 이를 거침없이 표현하는 정치인이 유 장관이다. 그런 그가 21일 장관직을 던졌다. 노 대통령은 사표를 수리하기로 했다. 유 장관이 노 대통령한테 받은 임무는 무엇일까. 열린우리당 소속 의원인 그가 돌아갈 곳은 당연히 정치권이다.

정세균 의장 등 당 지도부는 그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 노 대통령과 청와대에 '유 장관의 당 복귀 반대' 입장을 강력하게 전달했다. 그의 복귀가 범여권에 분란을 일으켜 통합에 장애가 될 것이란 우려 때문이었다. 그만큼 유 장관에게는 적이 많다. 청와대 일부 참모도 열린우리당의 이런 입장에 동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유 장관은 19일 문재인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노 대통령이 사표를 수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노 대통령은 20일 유 장관을 만나 당분간 정치권 흐름에 역행하지 말고 움직임을 조심하라고 당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유 장관은 21일 퇴임 기자회견에서 "당분간 장관의 경험을 토대로 집필에 매달리겠다"고 말했다.

-향후 거취는.

"국회의원으로, 당원으로 활동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다. 책 쓰기 이후의 특별한 계획은 없다."

-당 복귀 반대 목소리가 있는데.

"올바른 말을 하더라도 친절하게 했어야 하는데…. 나는 다른 사람의 노선과 정책을 비판했지 인격을 비난한 적은 없었다. (눈물을 글썽이며) 나는 큰 좌절감에 빠져 있는 정치인일 뿐이다."

-대선 주자로 나설 것인가.

"한번도 그걸 목표로 정치해 본 적 없다. 내가 좋아서 지지하는 지도자가 노 대통령이다. 장관까지 했으니 나는 노무현 정부와 정치적 생사를 같이할 거다. 설사 이 배가 침몰하더라도 뛰어내릴 권리가 내겐 없다."

그의 당 복귀를 거부하는 열린우리당 분위기 때문인지 유 장관의 표정은 어둡고 침울했다. 정치권에선 노 대통령의 19일 광주 발언이 장관직 사퇴 결행 시점을 엿보던 유 장관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는 해석이 많다.

"내가 속한 조직의 대세를 거역하는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말은 열린우리당의 해체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으로 들렸고, 그렇다면 당 해체의 공간을 파고들어 범여권 대선 무대에서 활동할 적기라고 판단했을 것이란 얘기다.

범여권의 핵심 관계자는 이날 "유 장관은 자신의 대선 무대 참여로 흐트러져 있는 범여권의 대선 판을 활성화하겠다는 의욕이 있는 것으로 안다"며 "최소한 범여권의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더 나아가 통합 신당의 후보들이 각축하는 '오픈 프라이머리(완전 국민참여 경선)'에 참여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유 장관은 '노무현의 가치'를 정치권에 펴는 전도사 역할도 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근 들어 강렬해진 노 대통령과 정동영.김근태 전 당의장 간의 격돌이 유 장관의 행보를 빠르게 했다는 시각도 있다. 유 장관은 열린우리당 참여 이후 줄곧 이들과 부딪치며 정치적 세를 넓혀 왔다.

특히 정 전 의장과는 서로 '기회주의자'와 '분열주의자'로 부를 정도로 날선 공방을 벌여 왔다.

청와대 이강철 정무특보는 사석에서 대선구도와 관련, "노 대통령은 열린우리당 정신을 사수하고 이슈를 적극적으로 선점해 갈 '싸움닭'을 원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유 장관의 효용가치를 잘 표현한 말이기도 하다. 대통령의 측근인 이광재 의원이 "노 대통령은 유 장관이 이번 대선에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유 장관 본인이 굳이 나선다면 이를 말릴 정도는 아니라는 게 청와대 기류다.

익명을 요구한 정치 평론가는 "유 장관은 범여권 통합에 참여하면서 친노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오픈 프라이머리에서 한판 승부를 벌이려 할 것"으로 관측했다.

김정욱.김은하 기자

유시민 장관의 정치 이력

▶2003.4. 16대 국회 재.보선에서 국회 입성. 흰 면바지('빽바지'), 노타이의 캐주얼 복장으로 의원 선서를 하려다 의원들의 "탁구 치러 왔나" 등 항의에 무산, 이튿날 정장으로 바꿔 입고 다시 선서

▶2003.11. 개혁당 해산, 열린우리당 창당 주도하며 노 대통령의 '정치적 경호실장'으로 자리매김

▶2004.5. 정동영 의장 등 당 지도부에 "열린우리당이 '궁정정치'를 하고 있다"며 직격탄

▶2005.3. 언론 인터뷰에서 당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을 겨냥, "정동영계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은 기간당원제를 폐지하기 위해 허송세월했다는 것"이라고 주장

▶2006.2.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임명되자 당내에서 반발

▶2007.4. 국민연금법 국회 통과 불발에 사의 표명, 대통령 반려

▶2007.5. 정동영.김근태 전 의장 탈당 및 당 해체 발언에 "당 떠날 사람 떠나라" 주장. 장관직 사퇴 및 당 복귀 결정 "당원.의원으로 할 일 수행할 것"이라며 대선 출마 가능성 열어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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