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왕 중국에 왜 가나/궁택 「위상높이기」 속셈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방한성과 없자 중국으로 방향선회/중도 과거청산 길터주며 실리추구
미야자와 기이치(궁택희일) 일본총리가 아키히토(명인) 일왕의 중국방문을 놓고 마지막 조정작업을 벌이고 있다. 미야자와총리는 최근 가네마루신(금환신) 부총재 등 자민당 4역에게 일왕의 중국방문에 대한 지지를 호소했다. 이 자리에서 자민당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가네마루 부총재는 협력을 약속했다. 따라서 일왕의 10월중 중국방문은 절차상 문제만 남게됐다.
미야자와 총리가 이처럼 일왕의 중국방문에 열심인 것은 과거청산과 정치인으로서의 개인적 야심,중국의 집요한 요청 등이 한데 어우러진 결과다.
미야자와 총리는 지난해 10월 집권후 「새로운 아시아외교」를 강조했다. 이에 따라 그는 첫 방문국가로 그동안 별 관심도 없던 한국을 선택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그의 방한 직전 「일본군이 종군위안부에 관여했다」는 자료와 국민학생의 정신대동원으로 불붙기 시작한 한국내의 반일분위기 때문이었다.
그의 방한후 한일 관계가 더욱 차가워진 것이 이를 말해준다. 미야자와 총리는 이같은 상황에서 중국으로 방향을 바꿨다. 중국을 끌어들여 아시아에서의 동반자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정책과 외교의 미야자와」라는 이름에 걸맞은 실적을 올리자는 심산이다. 또 중국은 중국대로 일본의 협력을 절실하게 원하고 있어 박자가 척척 맞는 꼴이 됐다.
미야자와총리는 참의원선거 승리로 정권의 안정기반을 굳히자 그동안 집요하게 추진해 왔던 일왕의 중국방문 실현에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한편 중국은 과거를 청산하지 못해 국제사회에서 별 존경을 받지 못하는 일본에 과거청산의 길을 열어주고 그대신 일본으로부터 경제협력을 얻어내자는 실리적인 입장에서 일왕의 중국방문을 강력히 요청해 왔다.
중국은 지난 89년 6월 탱크를 앞세워 자유를 외치는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한 천안문사건이후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 있다. 그후 서방세계에서는 일본을 제외한 어느나라도 국가원수가 중국을 방문한적이 없다. 정치는 접어두고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는 중국으로서는 자본주의 선진국의 협력이 간절하다. 그러나 천안문사태이후 중국은 선진국과의 파이프가 단절돼 있다. 이에 따라 중국은 89년 4월 리펑(이붕)총리의 일본방문때부터 지금까지 8번이나 일왕의 중국방문을 요청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가이후 도시키(해부준수) 전총리의 중국방문에 이어 상징적 존재인 일왕의 중국방문은 중국이 국제사회에 복귀하는 길을 열어주는 계기가 된다.
일본은 중일국교수립 20주년을 맞는 시기에 일왕이 중국을 방문함으로써 양국간의 우호관계를 재확인,과거청산이라는 짐을 덜게 된다.
일본은 이와 함께 중국을 국제사회에 끌어들임으로써 생색을 내고 아시아지역의 대표주자로 외교적 주도권을 쥘수 있게 된다.
중국은 일왕의 방중실현을 위해 그동안 『외국지도자를 곤란하게 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며 일제침략에 대한 일왕의 사죄수위에 대해 유연하게 대처하겠다는 입장을 수차 밝혀온 것으로 알려졌다. 또 중국은 그동안 종군위안부에 대해 배상요구를 하지 않겠다고 밝히고 자위대 해외파병에 대한 비난도 삼갔다.
물론 아직 우익들은 중국이 일왕을 불러놓고 실례를 하지않을까 우려해 일왕의 중국방문을 반대하고 있다.
또 그동안 중국과의 파이프 역할을 해온 다케시타 노보루(죽하등) 전총리는 파이프를 빼앗길까 하는 우려에서,나카소네 야스히로(중증근강홍) 전총리는 일왕의 한국방문이 불투명한 상태에서 중국만 방문하는 것은 과거가 청산됐다고 할 수 없다며 일왕이 방중에 소극적이다. 그렇지만 이제 대세는 일왕의 중국방문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이렇게 될 경우 과거가 청산되지 않은채 일본과 껄끄러운 관계를 지속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게 된다. 우리에게는 상황이 상당히 어려운 쪽으로 주위환경이 바뀌어가고 있다.<동경=이석구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