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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그림자' 서갑원의 육성증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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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현재 어디에 서 있는가. 그는 우리에게 어떤 대통령인가. 노대통령의 인간적 고민,그리고 국가 최고지도자로서 그의 고뇌는 무엇이었을까.서갑원 정무1비서관의 증언을 통해 지난 1년간 노대통령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다양한 사건들의 이면을 들여다본다.

월간중앙=고성표 기자

<인간 노무현, 대통령 노무현>

= 최대 유행어 된 "대통령직 못해먹겠다"

2003년 5월21일 오전 11시, 청와대 본관 2층 접견실.

이날 노무현 대통령은 '특별한 손님들'을 만나고 있었다. '특별한 손님들'란 다름아닌 5.18 기념재단 이사장직을 맡고 있는 강신석 목사, 정수만 유족회장을 비롯한 5.18행사 추진위원회 간부들. 이날 만남은 사흘 전인 5월18일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벌어진 '불미스러운 일'과 관련 추진위 관계자들이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청해 갑작스럽게 잡힌 일정이었다.

자리가 자리였던만큼 백악실 내부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다소 어색하고 무거웠다.강목사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지난번 기념식에서 불미하고 예의에 어긋나는 일로 누를 끼쳐 죄송합니다. 의도된 것은 아니었는데 어쩌다 그런 결과가 나타나 마음이 아픕니다. 언짢은 것이 있으시면 푸시고…"

간곡한 사과의 말이 건네졌다.

"그런 것은 아니고…"라며 노대통령이 잠시 말을 받았다. 강 목사는 "젊은 학생들이 혈기가 있어 다소 실수가 있었습니다. 광주에서 있었던 일을 너그럽게 생각하셔서 법적으로 문제가 있더라도…"라며 재차 사과와 선처를 부탁했다. 노 대통령은 "(마음이) 넓고 좁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분이 상하고 안 상하고의 문제도 아닙니다"라며 길게 말을 이어갔다.

국정을 원만하게 이끌어 가야 하는 대통령으로서의 고충을 호소하는 노대통령의 말이 이어지자 접견실의 분위기는 한층 더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런 일'을 당한 대통령으로서 당연히 언급할 수 있는 발언 내용이었다.

노대통령은 잠시 후 "모두가 힘으로 밀어붙이려고만 하니 이러다 대통령직 못 해먹겠다는 위기감이 듭니다"라는 다소 직설적이고 거친 화법으로 자신의 심정을 토해냈다.

이렇게 30여 분 간의 접견이 끝난 후 강목사 일행은 돌아갔다. 대통령은 12시부터 1시30분까지 오찬을 한 후 3시쯤까지 집무실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오후 3시를 조금 지난 시각, 대통령의 이날 발언 중 '문제의 대목'이 인터넷 언론 매체의 보도를 시작으로 급속히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집무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노대통령은 자신의 이날 발언이 이후 얼마나 큰 파장을 몰고 오리라는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단상과 의문-쉽게 이해되지 않는 新대통령의 출현(?)>

= "대통령직 못 해먹겠다."

'참여정부'라는 참신한 기치를 내걸고 노무현 대통령이 국정을 운영한 지 불과 3개월여 만인 2003년 5월. 노대통령의 입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이 말은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언론은 연일 이 발언을 두고 사설.칼럼을 동원해 비판적인 논조로 노대통령을 성토했다. 한나라당을 비롯한 정치권에서도 노대통령을 신랄하게 비난하며 냉소적 눈길을 보냈다. 국민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말 하려면 차라리 여기서 그만둬라."
"어떻게 일국의 대통령이 경솔하게 그런 말을 뱉을 수 있느냐?"

물론 "오죽 힘들었으면 그런 말까지 했을까"라며 대통령의 고충을 이해하려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지만 대체적인 반응은 비판적인 쪽이 훨씬 많았다.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노대통령의 이 말은 여전히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회사 생활에 지친 직장인들은 술자리에서 걸핏하면 "(힘들어서) 샐러리맨 못 해먹겠다"며 노대통령의 말에 빗대어 농을 던지고는 한다. 연말에는 각종 언론기관.인터넷매체 등에서 선정한 '2003년 올해의 말'의 영예(?)를 차기하기에 이르렀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지난 1년 동안 대통령과 관련된 각종 사건.사안들이 불거질 때 마다 "못 해먹겠다"는 말이 다시금 도마위에 오르내렸다. 급기야 "내일은 대통령이 또 무슨 말로 국민을 깜짝 놀라게 할까"라며 비아냥거리는 얘기까지 심심찮게 들려온다.

이에 대해 노대통령이나 청와대 참모들은 "대통령이 말하려고 하는 바의 전체 의도나 그런 표현이 나오게 된 상황 전반을 고려하지 않은 채 단지 특정 문구만 문제 삼은 데서 나온 오해"라며 불만스러워한다.

혹자는 지난 1년을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대통령상에 국민과 정치권이 적응해 가는 기간이었다"는 표현까지 했다.

저간의 사정이야 어찌됐든, 또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비해 지금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든 여전히 우리 국민들의 인식 속에는 '대통령'이란 어디까지나 진지하고 근엄한 모습을 한, 저 편 어딘가에 있는'절대자'에 가까운 혹은 일반인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로 남아 있다. 그런 존재인 대통령은 당연히 그에 걸맞은 모습으로 국민들 앞에 서야 한다고 모두들 생각한다.이러한 전통적인 인식의 틀에서 볼 때 노대통령의 이미지는 분명 너무나 다르다. 그것은 그 동안 그가 내뱉은 숱한 '말'들에 의해 일정하게 규정돼 버린 측면이 크다. 이렇게 해서 규정된 노대통령의 이미지는 '가볍다' '감정적이다' 혹은 '즉흥적이다'라는 식이 대부분이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노대통령의 이미지는 더 나아가 그의 국정운영 스타일은 어떻고 또 그가 행한 국가의 중요한 정책 결정은 어떠 어떠한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점을 미루어 짐작할 때 흔히 고려되는 하나의 중요한 판단 기준이 돼 버렸다.

취임 1년이 채 되지 않은 현재 30%대의 가장 낮은 지지율을 기록하며 '쉽게 이해되지 않는 대통령' '한국적 대통령의 전형에서 일탈한 대통령'으로 인식되며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현재 어디에 서 있는가. 그는 우리에게 어떤 대통령인가. 지난 1년간 그를 중심으로 벌어졌던 각종 사건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그 사건 속의 한가운데 위치한 대통령은 무슨 고민을 하고 있었던가.

지금부터 써 내려갈 테마들은 노대통령을 이해하기 위한 각각의 코드들이다. 다시 말하면 이는 노대통령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건과 사안들에 대한 것이다. 때로는 특정상황을 다룬 것도 있다. 그 구체적 예를 대강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지난 1년간 대통령을 중심으로 벌어졌던 온갖 크고 작은 사건들은 결국 대통령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각각의 코드나 다름없는 것이다.

단순히 대통령의 '가벼움' '감정적.즉흥적 대응' 혹은 '정략적 발상'의 차원에서 벌어진 사건들로 이해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무엇이 그 사건들의 이면에 있었던 것일까. 도대체 그러한 일들은 어떤 상황 속에서 벌어지게 된 것일까. 또 그 속에서 대통령은 어떤 고민을 했던 것일까. 대통령은 어떤 과정을 거쳐 그러한 결단들을 내리게 됐던 것일까.

이런 숱한 의문들은 '지난 1년간 청와대 안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때로는 이해를 돕기 위해 대통령 후보 시절, 더 거슬러 올라가 국회의원으로 활동하던 시기 혹은 재야 시절에 있었던 다양한 비사(秘史)들도 소개하려고 한다.

사소하고 사적인 부분에서부터 주요 행사나 일정 또는 각종 정책결정 과정에서 벌어졌던 다양한 사건 등 다소 공적인 부분에서 비쳐지는 노대통령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것이 '인간 노무현''대통령 노무현'을 좀더 깊이있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

<'대통령의 그림자' 서갑원 씨와의 만남>

기자는 앞에서 언급한 의문들을 풀기 위해 두어 달 전 모종의 취재를 계획했다. 그런데 마땅한 취재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대통령을 직접 만나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했다. 차선책은 대통령을 보좌하는 참모들을 만나 이 궁금증을 푸는 방법이었다. 가능하다면 참모들을 한 명이라도 더 접촉해 그들에게서 들은 각종 정보들을 취합, 분석해 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지난 두 달 동안 거의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굳이 변명하자면 주로 검찰쪽 취재를 전담하는 기자로서 지난 두 달 동안 대검 중수부의 대선비자금 수사 상황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말 그대로 '계획'에 그쳤을 뿐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할 수 있었던 것은 몇몇 참모들에게 만나줄 것을 집요하게 요청하는 것 뿐이었다.

사실 대통령의 복심을 가장 잘 알 만한 이는 문희상 비서실장, 문재인 민정수석, 유인태 정무수석 등 세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세 사람 역시 취재하기에 그리 만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이들은 1대 1 직접 취재는 물론이고 전화취재조차 쉽지 않았다. 결국 노대통령의 많은 참모들 중 현실적으로 접근이 가능할 뿐더러 의문들을 푸는 데 상당부분 단초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이들은 소위 노대통령의 최측근 '3인방'이었다.

이 '3인방'은 다름아닌 안희정.이광재.서갑원 등 386 참모들을 이르는 말이다. 이들 세 사람은 노대통령이 청와대의 주인이 되기 훨씬 전인 1990년 대 초반부터 최근까지 10년 이상 대통령과 생사고락을 함께 해 온 소위 대통령의 '젊은 동지들'이다. 이들 세 사람은 비록 문희상 비서실장, 문재인 민정수석, 유인태 정무수석처럼 현재 노대통령의 최고위급 참모는 아니지만, 대통령을 오랜 세월 보좌해 온 터여서 어쩌면 그들 이상으로 대통령의 속내를 정확히 이해하고 훤히 꿰뚫어 보는 참모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세 사람을 모두 만날 수 있다면 기자가 앞에서 가졌던 의문들,어쩌면 국민들 대다수가 가지고 있을 법한 의문들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상당부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그것 역시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안희정(전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 씨와 이광재(전 청와대 국정상황실장)씨는 각각 대통령 측근비리 의혹의 당사자로서 검찰의 수사 대상에 오르내리며 언론과의 접촉을 극도로 피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통령의 측근 중 측근으로서 소위 '좌(左)희정, 우(右)광재'로 불리던 이 두 사람이 모두 현직에서 물러난 상황에서 '3인방' 중 현직에 있으면서 대통령을 가장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이는 단 한 사람, 바로 서갑원 정무1비서관뿐이었다.

서비서관은 '대통령의 그림자'로 불리며 주로 의전을 비롯해 후보 시절 노대통령의 스케줄을 챙기고 관리하는 등 일반의 시선에서 비켜나 또 다른 최측근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서비서관은 노대통령 취임 초기인 2003년 2월부터 8월까지 대통령비서실 의전비서관과 행사.의전팀장을 겸임하다 자리를 옮겨 현재는 국회.정당을 담당하는 정무1비서관 직책을 맡고 있다.

기자의 인터뷰 요청을 받은 그는 번번이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만남을 피했다. 실상은 평소 내부의 일을 외부에 가서 발설하지 말라는 노대통령의 추상 같은 엄명이 더 큰 이유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럼에도 기자는 그에게 만나줄 것을 끈질기게 요청했다. 두 달여 간에 걸친 끈질긴 요청 때문이었던지 지난해 12월5일 서비서관은 마지못해 기자와 첫번째 만남을 허락했다. 그 후 두 차례의 만남까지 총 세 번의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지난 12년 동안 지근거리에서 보아온 노무현의 A부터 Z까지 거의 모든 것을 자세히 말해 주었다. 민감한 사안이 거론될 때마다 서비서관은 무척 조심스러운 태도로 신중을 기했지만 비교적 솔직하게 인터뷰에 응해주었다.

그의 증언을 토대로 지난 1년 동안 청와대 내외부에서 대통령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온갖 사건들 속으로 들어가 보자.

<첫 권력 행사 그리고 정면도전,-정가를 뒤흔든 깜짝 組閣과 '검사와의 대화'>

2003년 2월25일 오전 11시 국회의사당 앞 광장에서 취임식이 끝난 후 노대통령은 대통령 전용차인 링컨 컨티넨탈을 타고 청와대로 향했다.

서갑원 비서관의 회고.

"노대통령을 모시고 처음으로 집무실에 딱 들어서는데 가슴이 벅차더군요. 대통령께서는 집무실을 둘러보시더니 잠시 의자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 순간 제 눈에서는 눈물이 핑 돌았어요. 본관 경내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대통령은 오후부터 빡빡한 일정에 들어가셨어요."

한편 이날 문희상 비서실장은 첫 내각 내정자를 발표했다. 대통령으로서의 첫 권력 행사였던 셈이다. 각 부처 내정자가 발표되자 온 나라가 들썩거렸다. 특히 강금실 법무부 장관, 김두관 행자부 장관, 이창동 문화부 장관 내정 소식이 전해지자 정가는 발칵 뒤집혔다.

특히 사시 23회로 일선 지검 부장검사급인 강금실 변호사의 장관 내정 소식이 전해지자 법무부와 검찰은 큰 충격에 휩싸였다. 사실 검찰은 그 동안 각종 채널을 총동원해 청와대에 반대 의사를 전달했으나 대통령의 의지는 확고했다. 검찰개혁을 신호탄으로 국정을 쇄신한다는 전략이었다. 행자부와 문화부도 법무부와 비슷하게 충격 속에 하루를 보내야 했다.

노대통령은 특히 문화부 장관 인선에 심혈을 기울였다. 후보 시절부터 그는 문화.예술계 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입버릇처럼 행정관료가 아닌 문화계를 잘 이해하는 전문인을 기용하겠다고 말했다.

서비서관의 말.

"대통령은 다른 곳은 몰라도 특히 문화부는 우리 사회의 정식 공직 코스를 밟고 올라온 사람이 아닌 문화계를 잘 이해하는 인사가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즉, 행정고시로 선발된 관료들이나 국회의원출신들이 장악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노대통령은 후보 시절 언젠가 문화.예술계 인사들과의 만남에서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세계 제1의 문화국가인 프랑스는 앙드레 말로가 장관을 맡음으로써 지금과 같은 문화.예술 국가의 초석을 닦았다. 나도 그런 인물이 문화부를 맡아 그 초석을 놓았으면 좋겠다."

그의 생각대로 소설가이자 유명 영화감독이었던 이창동 씨가 문화부 장관에 내정됐다. 이장관 역시 후보 시절 노대통령의 팬이었다. 또 이장관은 지난 대선기간중 MBC '100분 토론' 후보 지지자 연설에 출연해시청자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오아시스'의 흥행 성공과 국제영화제 수상으로 대중적 지명도가 높아진 이장관이 공개적으로 노후보를 지지한 것에 대해 모두가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그렇지만 이장관은 이미 오래 전부터 노대통령을 지지하고 있었다. 재미있는 일화 한 가지.

2001년 가을 영화 '오아시스' 크랭크인 당시 모 영화 잡지의 편집장 A씨가 이장관을 인터뷰하기 위해 그를 만났다. 길지 않은 인터뷰를 마치고 난 뒤 가진 술자리에서 이장관이 A씨에게 불쑥 물었다.

"내년 대통령선거에서 누구를 지지할 거요?"

A씨는 우물쭈물하다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때부터 이장관은 '왜 노무현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1시간 동안 강의를 했다.

이장관의 강의를 듣던 A씨는 이렇게 물었다.

"노무현이 그런 사람이라고 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이 후보라도 되는 것이 어디 가능한 일입니까."

이장관이 답했다.

"당신부터 된다고 생각하면, 결국 그렇게 돼."

그리고 불과 6개월 후 정말 그렇게 됐다.

한편 강금실 법무장관은 취임 후 사시 17회 출신 차관을 내정한 데 이어 검사장급 이상 검찰 고위 간부 인사를 앞두고 파격적인 인사지침을 내놓았다.

2003년 3월6일 법무부 검찰 인사 지침에 검사들이 집단적으로 반발하기 시작했다.

서비서관의 증언.

"검찰 고위층이 반발하는 것에 대해서는 대통령도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평검사들이 집단으로 들고 일어서자 대통령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결국 '검사와의 대화'라는 전격적인 결정을 하게됐습니다."

2003년 3월7~8일 경기도 과천 중앙공무원연수원에서는 '참여정부 국정토론회'가 열리고 있었다. 국정토론회에 참석한 노대통령은 평검사들의 집단 반발 움직임을 보고받고 결단을 내렸다.

다시 서비서관의 증언.

"대통령은 검사들이 그렇게까지 막 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셨는데 의외로 반발이 거세자 결단을 내리신 겁니다. 참모들과 상의한 것이 아니었어요. 전격적인 결단이었죠. 참모들은 대체로 반대하는 분위기였습니다. 우선 형식 자체가 워낙 파격적이고 사회적 파장이 커질 것을 우려했거든요. 제가 알기로는 강금실 장관이나 문재인 수석도 처음에는 반대한 것으로 압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느냐고요."

다음날인 3월9일 오후 정부 종합청사 19층 대회의실에서는 마침내 '노무현 대통령, 검사와의 대화'라는 파격적 만남이 이루어졌다.

"예정 시간은 다 돼 가는데 막판까지 평검사회측과 조율이 안 돼 엄청 애를 먹었어요. 대통령 자리에 탁자를 놓는다고 했더니 검사들이 자신들 자리에도 탁자를 놔달라고 요구하고, 아무튼 시작 1시간 전까지도 안 한다느니 못 하겠다느니 하면서 성사가 불투명했어요. 결국 조그만 탁자를 앞에 놓고 겨우겨우 '검사와의 대화'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날 자리는 분명 대화의 자리였지, 토론이 아니었어요. 검사들의 독립을 보장해 줄 테니 대통령을 믿고 따라 달라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검사들이 도를 지나친 거죠. 그날 그 자리를 준비하면서 대통령의 뜻을 제대로 이해시키지 못한 저희 참모들의 책임도 있지만 우리 사회의 최고 엘리트라는 분들이 그랬다는 것이 좀…."

노대통령은 검사들과 국민들에게 검찰 독립과 개혁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밝히고 싶어했다. 또한 그 자리는 흔들리는 강금실 장관에게 확실한 힘을 실어 주자는 의도도 담겨 있었다. 이 위기를 잘 넘긴 강장관은 이후 국무위원 중 가장 업무 수행이 뛰어나고 국민에게 사랑받는 장관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한편 2003년 9월3일 뚜렷한 귀책사유 없이 김두관 행자부 장관에 대한 국회의 해임권고안이 의결되자 노대통령은 격노했다.

서비서관의 증언.

"대통령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며 '국민들도 이번에는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설득력이 없는 처사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후 약 보름간 해임권고안을 받을 것인지, 말 것인지 정말 많은 고민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9월17일 해임권고안을 받아들이고 행자부 장관에 허상관 씨를 내정했습니다."

그 후로도 위기는 계속됐다. 9월26일, 이번에는 윤성식 감사원장 후보에 대해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합세해 임명동의안을 부결시켜 버렸다. 윤후보에 대해 딱히 큰 결격사유는 없다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들이었다. 역시 노대통령을 압박하기 위한 정치적 공세였다.

"노대통령은 더 이상 이런 상태로는 안 되겠다 하시며 사흘 뒤인 9월29일 민주당을 탈당하셨습니다. 당시 민주당에서도 계속 탈당하라는 압력과 비난이 있었어요. 언젠가는 탈당했겠지만 윤성식 감사원장 후보에 대한 임명동의안 부결이 결정적으로 그 시기를 앞당겼죠."

<5.18일 망월동 사건과 노무현의 고뇌>

지난해 5월18일 오전 9시 광주 망월동 묘역. 1,000여 명의 한총련 소속 대학생들이 구묘역 정문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이들은 참배를 마친 후 10시10분쯤 방미 굴욕외교에 대한 항의서한을 전달하기 위해 대통령의 차량 행렬이 지나칠 신묘역 정문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들 중 일부는 신묘역 정문 부근에서 피켓시위를 벌이고 또 다른 일부는 노대통령에게 항의 서한을 전달하기 위해 신묘역 정문쪽으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행사장 정문으로 향하던 노대통령은 승용차 안에서 우려하던 상황을 보고받는다. 학생들의 시위로 도저히 정문 통과가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서갑원 정무비서관(당시 의전비서관)의 증언.

"대통령께서는 행사 당일 이전부터 마음이 무거우셨어요. K의원을 비롯한 일부 정치인들이 참여정부 출범 이후 전라도 출신 공무원들이 인사에서 불이익을 받는다는 주장을 펴며 노대통령을 비난했어요. 기껏 대통령으로 뽑아줬더니 전라도 사람들 다 죽인다는 것이었죠. 일부 언론도 이런 주장을 여과 없이 그대로 내보내며 갈등을 부추기기도 했고요. 그런 상황 에서 대통령께서 행사 당일 광주로 가셨던 것입니다."

정문 통과가 어렵다는 보고를 받고도 노대통령은 단호했다.

"그냥 정문으로 갑시다."

대통령의 이런 지시가 있었지만 현장을 지휘하는 경찰 책임자는 물론이고 대통령 경호팀이나 의전팀에서는 결코 그 지시대로 따를 상황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마냥 머물러 있을 수도 없었다. 그야말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급박한 순간이었다.

"대통령은 그대로 가자고 하셨지만 참모들의 생각은 달랐어요. 대부분은 상황이 좋아지지 않으면 그냥 (서울로)돌아가자는 쪽이었습니다. 억지로 정문까지 갔다가 자칫 시위 학생들에게 대통령 차량이 포위되기라도 하는 상황이 오면 그 때는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었죠. 틀린 말은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의전을 맡은 제 입장에서는 대통령이 참석하는 중요한 국가행사가 외부의 방해로 무산되는 상황을 결코 상상할 수 없었어요. 더구나 여기까지 와서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고 이대로 돌아가면 다음날 일부 신문들의 1면 톱기사의 제목이 '광주가 노대통령을 버렸다'는 식의 제목을 뽑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니 뒷골이 다 뻐근했어요. 순간적으로 후문으로 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죠. '정문이 안 되면 후문이 있을 테니 그쪽으로 가면 어떻겠느냐'라고 물었어요. 잠시후 경찰 책임자가 '후문은 괜찮다'고 알려왔습니다. 그래서 경호실장에게 '후문으로 갑시다'고 했어요. 그런데 경호실장은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쭈뼛쭈뼛 하는 모습이었어요. 대통령은 여전히 정문쪽으로 밀고 가자고 하시는 상황이었고, 또 정문으로 가다 정 안 되면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계셨던 것 같아요. 그러니 대통령께 후문으로 가자고 차마 말씀드리지는 못하겠고…."

결국 대통령 차량 일행은 서비서관의 주장대로 후문쪽으로 향했다. 차가 막 출발할 때는 노대통령도 후문으로 통과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후문으로 향하는 동안 "현장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후문으로 간다"는 보고를 받게 됐다. 대통령도 더 이상 정문으로 가자는 고집을 피울 수는 없었다. 도착 예정 시간을 20분 가량 넘긴 11시20분쯤 노대통령 일행은 무사히 행사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식을 마칠 수 있었다.

서비서관의 빠른 판단과 대응으로 기념행사는 무사히 마칠 수 있었지만, 다음날 각 언론매체에서는 이날의 대치 상황을 자세히 보도했고 급기야 일부 언론에서는 대통령의 리더십 문제를 거론하며 비판의 화살을 날리기도 했다.

그로부터 3일 후인 5월21일. 글 첫머리에서 묘사한 대로 사건은 엉뚱한 곳에서 터져나왔다.

서비서관의 증언.

"이날 터져나온 '대통령 못 해먹겠다'는 푸념은 일종의 감칠맛 나는 사투리성 표현이었어요. 정말 힘들어 때려치우고 싶다는 뜻이 아니라 시골에서 '워메! 힘들어 정말 죽것네' 하는 식의 생활적인 표현을 하신 것인데…. 그리고 대통령의 그 말씀이 있었을 때 참석자들은 대통령의 그런 표현에 모두 파안대소하며 웃고 넘겼어요. 그 전까지는 분위기가 조금 딱딱하고 무거웠는데 오히려 그 발언 한 마디로 분위기가 화기애애하게 변했어요. 언론이 이런저런 정황은 무시하고 오직 그 대목만을 강조하는 바람에 예상치 못하게 파장이 컸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그 발언 자체가 아니고, 그런 고충을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상황들이다. 비록 5.18 행사 관계자들과의 만남의 자리에서 터져나온 발언이기는 했지만 사실 대통령을 힘들고 괴롭게 만들었던 사건은 꼭 5.18 행사장에서 있었던 사건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5.18 1주일 전, 그러니까 방미 기간에 있었던 '또 다른 사건'은 대통령을 더욱 힘들고 괴롭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사건이야말로 "못 해먹겠다"는 고충을 털어놓게 만든 직접적인 계기가 됐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다름아닌 그해 5월2일부터 약 2주간 계속된 '화물연대 파업'이었다.

<대통령의 밤잠 설치게 했던 '화물연대 파업'>

2003년 5월11일 일요일. 오전 9시 청와대 본관 1층 세종실.

일요일인데도 이날 세종실에는 대통령을 비롯한 국무위원 전원이 긴급회의를 갖고 있었다. 더구나 이 날은 대통령 취임 후 첫 미국 순방길에 오르는 날이어서 이 날의 국무회의는 다른 때와는 사뭇 그 분위기가 달랐다.

대통령이 외국 순방길에 오르는 날, 그것도 일요일에 국무회의가 열린 예는 거의 없었다. 그만큼 이날의 회의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화물연대 파업 해결이 가장 시급합니다. 조기에 수습할 수 있도록 노력해 주기 바랍니다."

대통령은 왜 방미(訪美)를 앞둔 시점에서 화물연대 파업의 조기 수습을 국무위원들에게 당부했던 것일까. 이는 미국 방문의 주요 목적 중 하나였던 외국인 투자단 유치 문제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대통령은 방미를 앞두고 국무위원들과 참모들에게 이번 방미의 목적을 크게 두 가지로 설명했다.

하나는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미국과의 공조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바로 국내 경기 활성화를 위한 외국인 투자단을 유치하는 문제였다.

이 두 가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수행하는 참모들에게 귀가 따갑도록 주지됐던 핵심 과제였다. 노대통령은 방미의 성과물로 이 두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들을 국민들에게 보여주고 싶어했다.

아무튼 국무회의가 끝난 직후 노대통령은 수행원들과 함께 서울공항으로 출발했다. 오전 11시쯤 대통령을 태운 전용기는 뉴욕을 향해 이륙했다.

방미 3일째 되던 5월13일 오전 1시(현지시간 12일 낮 12시). 노대통령은 숙소인 뉴욕 월도프아스토리아 호텔에 마련된 임시 집무실에서 수행비서들과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대통령은 갑자기 책상에 설치된 전화기(임시로 설치된 핫라인으로, 버튼 하나만 누르면 연결된다)의 수화기를 들고 버튼을 눌렀다. 서갑원 비서관의 증언.

"집무실에 들어오셔서 잠시 방을 거닐다 갑자기 책상쪽으로 걸어가시더니 전화기 버튼을 누르시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어디로 전화하시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어요. 그런데 곧이어 '나 대통령인데…'하시는 거예요. 아마 청와대 교환원이 무척이나 당황했을 것입니다. 미국에 계신 분이 그것도 직접 전화하셨으니까요."

대통령과 청와대 교환원의 통화는 계속됐다.

"화물연대 파업 상황이 궁금하니 (국정)상황실로 연결해 주게."

그런데 상황실에서는 아무도 전화를 받는 이가 없었다. 대통령은 다시 교환원에게 "상황을 어디서 보지? 담당자에게 연결해 봐"하고 재차 요구했다. 교환원은 이번에는 전화를 당직실로 돌렸다. 그러나 당직실 역시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연결이 지연되자 노대통령은 약간 짜증섞인 목소리로 "어딘가 상황 보는 데가 있을 것 아니야?. 국정상황실에 아무도 없어?"하며 교환원을 다그쳤다.

"경호실 종합상황실로 연결하겠습니다."

"아, 경호실인가? 지금 파업 상황이 어떻게 돼 가나?"

전혀 소관이 다른 경호실 관계자에게 파업 상황을 묻는 노대통령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을 것이었다.

"… 저희는 그 부분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잠시 후 다시 노대통령은 교환원에게 말했다.

"경호 말고 비서실 내에 상황 근무자가 있을 텐데…."

대통령의 짜증 섞인 통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서비서관은 그 순간의 당혹스러움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했다.

"땀 났죠. 옆에서 들어도 답답한데 대통령은 얼마나 짜증나고 답답했겠습니까. 아마 그 교환원도 청와대 근무 이래 그때처럼 당황했던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청와대에서 파업상황 담당 부서는 국정상황실내 치안상황반이다. 그런데 국정상황실로 연결해도 연락이 닿지 않고 겨우 연결된 경호실 관계자는 파업 상황을 알 리가 없었다. 결국 노대통령은 붙잡고 있던 수화기를 털썩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이 날의 전화 사건은 나중에 국내 언론을 통해 세간에 알려지면서 또 한번 참여정부의 고장난 국정운영 시스템의 대표적 사례로 거론되며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이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미 여러 번 거론됐던 청와대의 국정운영 공백 상태가 아니다. 당시 왜 노대통령은 수행비서가 있었음에도 직접 전화를 걸어가면서까지 파업 상황을 챙기려 했던 것일까. 이는 단순히 '즉흥적이고 돌출적인' 노대통령 특유의 행동에서 비롯된 돌발상황으로 볼 문제가 아니었다. 또 항간의 소문처럼 노대통령이 불시에 청와대 근무 기강을 테스트해 보기 위해 즉흥적으로 벌인 '쇼'도 아니었다.

노대통령은 파업사태를 순방 당일 오전 긴급 국무회의를 개최해 특별히 당부했을 정도로 심각하고 중대한 문제로 여겼다는 점이다. 다시 서비서관의 증언.

"방미 사흘째 되던 날까지도 여전히 화물연대 파업 사태가 해결되는 기미가 보이지 않자 대통령은 크게 걱정하기 시작했어요. 하루는 대통령께서 어찌나 걱정이 되시던지 수행비서들에게 푸념하시더군요."

"내일 당장 미국 경제인들을 만나 국내 투자 여건이 좋으니 안심하고 투자하라고 설득해야 하는데 등 뒤에서(국내에서)는 저 난리가 나 있고, 이 사람들에게 무슨 낯으로 투자하라고 해야 할지 정말 막막하구먼."

서비서관은 당시를 대통령이 취임한 이래 가장 힘들게 보냈던 시기로 기억하고 있다.

"이라크 파병 문제, 한총련 사태, 검사와의 대화, 재신임 문제 등 굵직한 사건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 대통령께서 밤잠을 못 주무실 정도로 힘들어하고 괴로워했던 것은 방미를 앞두고 또 방미 기간중 화물연대 파업사태가 해결되지 않았던 때였던 것 같습니다."

참모들의 입장에 따라 또는 보는 시각에 따라 가장 힘들었던 사건이야 다를 수 있겠지만 어찌 됐든 국민들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노대통령은 '화물연대 파업' 문제로 괴로워했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대통령이 청와대로 직접 전화까지 하며 챙기는 등 각별한 관심을 보인 탓이었을까…. 계속될 것만 같았던 화물연대 파업은 대통령 방미 5일째 되던 5월15일 극적으로 타결됐다.

노대통령은 방미 외교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5월17일 귀국길에 올랐다. 긴장된 가운데 떠난 첫 해외 순방길이었지만 성공적으로 치러냈다는 내외의 평가를 받고 노대통령은 비교적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기내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노대통령은 돌아오는 길에 노트북에 장착된 DVD롬을 이용해 두 편의 한국영화'공공의 적'과 '가문의 영광'을 감상했다.

<고독한 결단의 순간-"어떤 참모가 감히 대통령직을 걸라고 말하겠습니까">

'권력의 바다 위에 떠 있는 외딴 섬.-'

대통령은 본래 고독하다. 최고의 권력자이면서도 가장 고독한 사람이 바로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어떤 순간에 그리고 왜 고독감을 느끼는 것일까. 국가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단의 순간 그리고 그 결단에 대해 최종적으로 무한책임을 져야 하는 존재가 바로 대통령 자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1년간 노무현 대통령에게는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결단을 내려야 할 순간들이 많았다. 평검사와의 대화, 이라크 파병, 재신임 국민투표 제안 등은 대통령의 중대한 결단을 필요로 하는 대표적 사건들이었다.

서갑원 비서관은 이 중에서 특히 지난해 10월10일 전격적으로 발표된 노대통령의 '재신임 선언'의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 대통령의 결단이었다고 설명했다. 서비서관의 증언.

"10월10일 오전 춘추관에서 대통령 긴급 기자회견이 열렸어요. 기자회견 1시간 전쯤 대통령께서 느닷없이 재신임 말씀을 꺼내셨어요. 이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이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며 황당해 했죠. 그러다 '드디어 여기까지 와 버리는구나'하는 생각에 비참하고 참담한 심정이었죠. 참모 된 입장에서는 죄송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비장한 생각도 들더군요. 마치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할 때의 심정이라고나 할까요. 밖에서는 이 결정을 두고 정략의 산물이니 하며 온갖 말들이 많았지만, 그날 대통령의 결심은 참모들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는 것이었어요."

그렇다면 노대통령은 어떻게 해서 재신임을 결심하게 된 것일까.

10월6일 노대통령은 'ASEAN+3 정상회담' 참석차 인도네시아 발리를 방문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인 7일 이광재 국정상황실장의 수백만 원 금품 수수설이 터져나왔다. 당시 이실장은 "요즘 나에 대한 근거 없는 소문들이 나도는데 3~4일만 지나면 해프닝으로 끝날 것"이라며 당당하게 부인했다. 그런데 다음날인 8일 연이어 최도술 전 총무비서관이 SK에서 11억원의 금품을 수수한 사실이 검찰 수사 결과 드러났다. 같은 시각 발리에서는 노대통령이 인도네시아의 메가와티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있었다. 정상회담이 끝난 후 대통령은 최 전 비서관의 금품 수수 보고를 받고 큰 충격에 휩싸였다.

10월9일 귀국한 대통령의 머릿 속에는 온통 최 전 비서관 문제로 가득 차 있었다. 아마도 이날 밤은 노대통령에게 무척이나 길고 고통스럽게 느껴졌을 것이다.

엄청난 고민과 번민이 교차하는 고독한 시간들이었을 것이라고 청와대 참모들은 입을 모은다. 서비서관은 "노대통령은 자신의 재신임을 묻겠다는 생각을 청와대 참모들과는 일절 상의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대통령 스스로 결정하고 참모들에게는 통보하는 식으로 급작스럽게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참모들이 알게 됐을 때는 이미 대통령의 뜻이 너무 확고해 만류해도 소용 없었다.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기자회견을 할 사안이 아닙니다" 하며 극구 만류하는 참모들에게 노대통령은 오히려 살짝 웃으며 "그냥 합시다" 라며 기자회견을 강행했다.

다시 서비서관의 증언.

"밖에서는 재신임 결단 후 정국 상황을 놓고 노대통령과 청와대 측근들의 고도의 정략적 판단이 개입된 결정이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미리 시뮬레이션을 돌려 재신임을 던지면 민주당은 어떻게 반응할 것이고 한나라당은 또 어떻게 나올 것이며 국민들 여론은 어떻게 형성될 것이라는 등을 고려하지 않았겠느냐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는데, 맹세코 그렇게 해서 나온 결정이 아니었어요. 아니, 도대체 어떤 참모가 정국을 돌파하기 위해 윗분에게 대통령직을 걸자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결정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당신 스스로 얼마나 절박한 상황이었던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대통령 입장에서는 최 전 비서관이 1억원을 받았든 10억원을 받았든 액수의 많고 적음은 문제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참여정부'는 그 어떤 정권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이제 무슨 낯으로 국민들 앞에 나서겠느냐는 심정이었어요. 국민 신뢰의 마지노선이 무너져 버렸다고 여긴 거죠."

한편 재신임 결정은 청와대 참모는 물론이고 고 건 국무총리와도 한 마디 상의하지 않았다. 노대통령은 기자회견 뒤 고총리, 문희상 비서실장, 문재인 민정수석, 유인태 정무수석 등과 오찬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고총리에게 "미리 상의하지 못해 미안하다. (총리가 국정운영에)부담을 더 갖게 됐다"고 말한다.

이처럼 재신임 결정 과정에서 노대통령은 총리와 청와대 참모들을 철저하게 배제한 채 순전히 단독으로 결단을 내렸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일각에서는 그래도 사전에 누군가와 상의하지 않았겠느냐고 말하기도 한다. 즉, 최 전 비서관, 이실장 등 측근들의 비리 혐의와 의혹이 연이어 제기되는 상황에서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돌파구를 찾는 과정에서 노대통령이 부산 지역의 오랜 동지들에게 의견을 구하고 재신임과 관련된 자신의 입장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이었든 최종적으로는 재신임이라는 결단을 내린 것은 분명 대통령 자신이었다.

재신임 결정과 더불어 이라크 1차 파병 결단을 내리기까지는 대통령에게 또 하나의 고독과 외로움의 시간이었다. 서비서관의 증언.

"최근의 추가 파병 논의 때보다 1차 파병 때가 대통령에게는 훨씬 고민의 정도가 심했던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첫 파병인 데다 우리의 지지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이 반대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노대통령이 내질러 버리기(파병 요청 거부)를 원했어요. 원래 노무현의 모습을 보이라는 것이었죠. 그러라고 뽑아준 것 아니냐며 대통령을 강하게 압박했어요. 그렇지만 노대통령이 자문을 구하기 위해 만난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파병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그들은 모두 우리 사회의 지도급 인사들이었는데, 파병하지 않으면 마치 나라가 망할 것처럼 파병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더구나 파병 문제가 북핵 문제와 연동돼 있어 더욱 복잡한 상황이었습니다."

파병과 파병 반대는 너무나도 극명하게 엇갈렸다. 그러던 차에 대통령의 가슴을 찔러오는 한 가지 경험을 하게 된다.

모 방송국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고 노대통령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참모들에게 "북한에 대해 비교적 온건한 정책을 취했던 클리턴의 민주당 정부 때도 실제로 북한 폭격을 준비했었고 마지막 결행만 남았었다는데…. 하물며 북한에 강경한 부시 행정부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한 방에 북한을칠 수 있지 않겠나"라며 충격과 우려를 표명했다.

사실 TV프로그램 하나 때문에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 얼른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만 서비서관은 일반 국민이 보고 느끼는 충격과 국가를 책임진 지도자가 보았을 때 느끼는 충격의 강도는 분명 다르다고 강조했다.

"국민들은 미국의 북한 폭격 가능성이 0.1%라고 하면 그럴 리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지도자의 입장에서는 그 정도의 가능성만 있어도 살떨리는 상황입니다"

결국 북핵 문제 해결, 경제 상황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 노대통령은 현실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파병 결정 당시 노대통령의 속내는 과연 어떠했을까. 서비서관의 증언.

"아마 당시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고민이 깊었던 것으로 압니다. 대통령께서는 기본적으로는 (파병을) 피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안 보낼 수만 있다면 안 보내고 싶다고 하셨거든요. 그렇지만 현실적 문제 때문에 전투병이 아닌 비전투병 파병으로 파장을 최소화하려고 하셨습니다. 이런 대통령의 고뇌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참모들도 파병은 죽어도 안된다는 말을 하지 못했어요."

<노무현과 dj 그리고 8시간 동안의 격론>

2003년 3월14일 청와대 본관 임시국무회의장. 노대통령은 대북송금 사건 특검법을 공포할 것이냐 아니면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냐를 결정하기 위해 임시 국무회의를 소집했다. 그 자리에서 노대통령은 장관들에게 자유로운 토론을 요청했다.

그 결과 발언에 나선 6명의 장관 중 5명이 거부권 행사를 주장했고, 수용은 단 1명 뿐이었다. 우선 강금실 법무장관이 특검 수용 불가 법률검토 보고를 했다. 이어 허성관 해양수산, 정세현 통일, 지은희 여성, 윤진식 산업자원, 김영진 농림부 장관 등이 토론에 나서 의견을 밝혔던 것. 허장관을 제외한 대부분의 각료는 노대통령에게 거부권 행사를 건의했다.

40여 분 동안 토론을 지켜보던 노대통령은 "이 문제는 나에게 맡겨 달라"며 뭔가를 결정한 듯 기자실을찾았다. 그리고 잠시 후 특검법을 공포했다.

회의석상에서 토론문화를 중시하던 노대통령의 이 같은 결정에 국무위원들은 다소 당황스러웠다.

서비서관의 증언.

"당시 대통령께서는 특검을 받을 것이냐 말 것이냐를 놓고 엄청나게 고민했습니다. 호남민심도 살펴야 했죠. 그런데 이미 불법 송금과 관련된 사실들이 나올 만큼 다 나와서 기정사실화된 부분들이 많았어요. 대통령 입장에서는 남북정상회담의 의의를 인정하고 계승하는 것과 그 과정에서 파생된 불법적 돈거래는 별개로 볼 수밖에 없었어요."

노대통령의 속내는 이랬다.

"덮을 수만 있다면 덮고 가고 싶다. 그러나 이게 덮는다고 덮일 문제냐? 이미 상당부분 드러났는데…. 불법 송금 자금에 대한 특검이지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특검은 아니지 않은가. 현 상황에서 특검을 안받고 넘어갈 재간이 없다. 만약 지금 이를 회피하고 그 짐을 안고 간다면 남북 문제는 더 이상 한 발자국도 진전시킬 수 없다. 특검을 받지 않으면 원내 제1당인 한나라당이 가만히 있겠는가. 햇볕정책을 승계해 끝까지 가기 위해서라도 우선 걸림돌이 되는 것은 치우고 갈 수밖에 없다."

특검법이 수용 공포되자 일각에서는 노대통령의 386 측근 참모들 중 상당수가 반 DJ쪽이라서 특검을 수용한 것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다. 이에 대해 서비서관은 단호하게 설명했다.

"일부에서 그렇게 몰아붙였던 것을 알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반 DJ를 해서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또 우리가 반 DJ를 할 정도로 DJ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노태우 대통령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짐을 벗으려고 했고, 김영삼 대통령이 노태우 전 대통령의 짐을 벗으려 했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결코 DJ의 짐을 벗으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또 정치적으로 짐이 된 것도 없어요."

그러나 대북송금특검에서 시작된 수사는 이후 대검 중수부에서 바통을 이어받아 DJ 정부의 핵심 참모들이 줄줄이 사법처리되는 결과를 낳았다.

DJ와 노무현의 관계를 단지 대북송금특검의 결과로만 재단할 수는 없다. 이들은 1980년대말 1990년대를 거쳐오면서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이어왔다.

"언젠가 전라도에 가서 손 내밀 때가 있을 걸세"

노대통령이 DJ와 호남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비사(秘史) 한 토막.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야권은 복잡다단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노대통령은 당시 김원기.이부영.이 철.김정길 등과 함께 '국민통합추진회의'(이하 통추)의 멤버로 야권통합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다소 느슨한 형태로 모임을 유지하던 통추도 대선 레이스가 가속화하자 점차 분열되기 시작했다. 소위 세대교체가 우선이냐 정권교체가 우선이냐였다. 이부영.이 철.제정구.박계동 등은 세대교체를 주장했다. 반면 노대통령은 정권교체 쪽에 마음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정치속에서 노대통령도 쉽게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1997년 10월 어느날. 서울 종로구 명륜동 현대하이츠 빌라 3XX호. 노대통령은 4명의 최측근들을 자신의 집으로 불러모았다. 이강철.안희정.이광재.서갑원이 그들이다. 국민회의로 가느냐 아니면 신한국당이냐를 놓고 노대통령의 마지막 선택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었다.

저녁 8시쯤 모여 식사를 한 후 거실에 빙 둘러앉은 다섯 사람은 다음날 새벽 4시까지 열띤 토론을 벌였다. 노대통령을 제외하고 DJ쪽으로 가자는 의견과 이회창쪽으로 가자는 의견이 정확히 2대 2로 갈렸다. 8시간에 걸친 장시간의 토론 동안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참모들의 의견만 듣고 있던 노대통령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DJ한테로 가세!"

노대통령은 측근들에게 왜 DJ를 지지해야 하는지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서비서관은 꽤 세월이 흘렀음에도 당시 노대통령의 워딩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었다)

"1992년 대선 때 DJ를 앞세워 선거를 치렀는데 결국 졌지. 그때 '한겨레신문'은 광주의 하늘이 시커멓다고 했어. 모든 호남인들은 좌절했고. 그 때는 이기택.김정길.이 철.홍사덕 할 것 없이 모두 DJ를 도와 선거를 치렀는데도 지고 말았어. 그런데 이번 대선은 이미 다 갈라질 대로 갈라지고 그때 사람들은 아무도 없어. 결국 전라도 사람들끼리 치르는 선거가 되고 말았어. 이미 이번에도 다들 지는 게임으로 결론났다고 하는데 그래도 한 국가를 책임지겠다고 이 논의를 하는 우리들인데… 전라도 사람들의 가슴 속에 깊게 팬 골을 누가 메워줄 수 있을까. 나라도 그 골을 메워주고 싶으이. 노무현.김정길이마저 없다면 전라도 사람들이 얼마나 좌절하겠어? 언젠가 때가 되면 내가 전라도에 가서 손을 내밀 걸세. 그때 당신들하고 함께 갔다고 당당하게 요구할 날이 있을거야."

노대통령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이강철.이광재 씨도 "그렇게 합시다"라며 바로 승복했다.

서비서관의 증언.

"사실 노대통령의 당시 그런 결정은 현실정치인으로서는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어요. 이회창 총재쪽에서는 각종 옵션이 붙어왔거든요. 도와만 주면 종로든, 부산이든 아니면 장관 자리든 한 자리 챙겨 주겠다는 제의였죠. 또 엄연히 당 대 당 통합이니 협상의 전권을 노대통령에게 준다는 제의도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상당히 좋은 조건들이었죠. 반면 DJ쪽에서는 아무런 조건이나 제의가 없었어요. 한번은 노대통령과 친분이 두터운 김정길 의원이 푸념하듯 농을 던진 적이 있었어요.'우리도 이제부터 편하게 좀 삽시다. 우리도 되는 쪽으로 가서 서야 하지 않겠어?' 그러자 노대통령이 '가려면 당신이나 가시오. 나는 그리로 안 갑니다'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했어요."

마침내 11월초 노대통령과 김정길 의원은 나란히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해 DJ를 도와 대선을 치렀다. 그리고 결국 호남인들의 염원은 이루어졌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고 돈다고 했던가. 2002년 4월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선 노대통령은 예상을 뒤엎고 광주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했다. 5년 전 호남인들의 손을 잡아 주었던 노대통령은 광주 경선 때 호남인들에게 당당히 손을 내밀었고, 호남인들은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광주 경선의 승리를 기점으로 이른바 노풍(盧風)이 거세게 불기 시작해 결국 노대통령은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됐다.

<노무현의 청와대 개조론-"토마토를 재배(?)하라">

2003년 3월18일 오전 9시 청와대 본관 충무실 국무회의. '2004년도 예산편성안'을 주제로 놓고 국무위원들 간에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국무회의에서 토론이 벌어지는 것은 이전 정권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과거 같으면 기획예산처가 예산 편성 '지침'을 만들어 보고하면 형식적 논의를 거쳐 대통령의 재가를 '득'함으로써 정부 방침으로 확정됐다. 그러나 노대통령은 예산편성안은 지침이 아니며 토론안이라고 제한을 둔 다음 각 부처 장관들이 의견을 내도록 주문했다.

이날 국무회의는 각 부처 장관들이 의견 개진을 활발히 한 덕분에 12시 가까이 토론이 이어졌다. 일반적으로 과거의 국무회의는 법안이나 안건을 심사해 넘기기에 바빴다. 그러다 보니 회의 분위기는 무겁고 딱딱했으며 가라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참여정부'들어 이런 회의 분위기는 웬만해서는 찾아볼 수 없다.

매주 화요일에 열리는 국무회의는 9시부터 시작해 12시가 다 돼야 끝난다. 앞에서 예를 들었듯 매주 국무회의에서는 새로운 안건을 토론에 부친다.

국무회의 중간에 '티타임'이 생긴 것도 참여정부 들어 생긴 새로운 문화다. 보통 9시부터 회의를 시작하면 약 1시간15분 후인 10시15분께부터 15~20분 가량의 '티타임'을 갖는다. 보통 회의실 입구 탁자 위에는 1회용 커피와 종이컵이 준비돼 있다. 국무위원들은 직접 커피를 타 마시며 삼삼오오 모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대통령 역시 커피를 마시며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국무위원들과 담소를 나눈다.

서비서관은 "이 때의 풍경이 보기에도 좋을 뿐더러 국무위원 당사자들도 이 시간을 무척 즐긴다"고 말한다.

지난해 11월25일 국무회의에서 노대통령의 '개'와 '고양이' 비유 발언 역시 이 자유로운 '티타임' 때 나온 농담이다. 비록 적절하지 못한 야당 비하 발언이라고 해서 한나라당의 항의를 받기는 했지만, 그만큼 이 자리에서 편하고 자유스러운 분위기가 연출됨을 의미하기도 한다.

청와대가 가장 많이 바뀐 부분 중 하나는 바로 이러한 회의 분위기다. 노대통령이 워낙 토론하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거의 모든 회의는 토론식으로 바뀌었다. 매주 월요일 열리는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도 바뀌었다. 각 수석실이 보고하는 내용 가운데 대통령이 수시로 "이것은 토론해 봅시다"라고 토론을 자연스럽게 유도하기도 한다. 한번은 수석보좌관회의에 김대중 정부에서 만든 제2건국위원회를 폐지하자는 안이 보고됐다. 제2건국위는 새로운 국민운동상을 정립한다며 반관반민 조직으로 만든 것인데, 정치적 중립성 시비가 벌어져 실효성을 발휘하지 못한 터였다. 그래서 폐지 의견이 우세했는데 유인태 정무수석이 "그래도 조직 스스로 충격을 완화시킬 말미는 주는 것이 좋겠다"고 반박해 일단 폐지 결정은 유보됐다.

얼마 전에는 '토마토'라는 것이 새롭게 생겼다. '토마토'는 '토요일마다 하는 토론'의 준말이다. 비서관별로 매주 토요일 주제를 정해 토론하고 그 결과를 공유한다.

토론문화와 더불어 노대통령이 스스로 벗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권위주의 문화다. 서비서관은 아주 사소한 부분이지만 대통령이 권위적 요소를 하나 둘 깨뜨리려고 했던 실례들을 들려주었다.

청와대 본관 백악실은 주로 10인 이하의 손님들이 방문할 때 사용하는 장소다. 서비서관의 말.

"언젠가 백악실에 나온 대통령께서 의자에 앉으시더니 '왜 이렇게 내 의자는 높게 해 놓았느냐'고 하신 적이 있습니다. 노대통령께서는 참모들이 일부러 대통령의 의자만 조금 높여 놓은 것으로 생각하고, 의자 높이를 다른 자리 의자와 맞춰 낮추라고 했어요.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는 생각이 들었나 봅니다. 대통령은 또 '손님들과 같아야지 내 것만 높아서야 되겠느냐. 그러지 말라'고 지적하기도 하셨더군요."

노대통령의 이런 탈권위적인 모습은 이미 오래 전부터 습관적으로 몸에 배어 있다. 서비서관이 노대통령을 처음 만난 1992년 7월. 서씨의 증언.

"처음으로 수행비서를 할 때, 으레 저는 운전기사 옆자리에 앉았죠. 그런데 갑자기 대통령께서 '어이 갑원 씨, 이리 뒤로 오게'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아니, 괜찮습니다'하고 거절했죠. 그랬더니 또 한번 '어이, 이 사람아 뒤로 와' 하시며 재차 그러시길래 처음에는 저를 특별히 배려하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곧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이 사람아, 내가 자네 뒤통수에 대고 무슨 얘기를 하겠나? 자네를 데리고 다니면서 얘기도 하고, 토론도 하려는 건데…. 자네를 단지 내 심부름이나 시키려고 데리고 다니는 줄 아나?"

그 후 저는 항상 노대통령 옆자리에 앉게 됐습니다.

최근 일반인들을 상대로 직접 이메일을 띄우는 것도 권위주의와는 거리가 먼 모습니다. 서비서관은 노대통령이 지극히 실용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전한다. 지난 5월 방미 기간중 전화 사건도 어찌 보면 이런 노대통령의 사고방식에서 파생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스스로 궁금한 부분이 있으면 보좌관이나 비서관을 통하지 않고 본인이 직접 전화를 걸어 해결하는 경우가 많다.

노무현의 청와대가 크게 달라진 또 하나의 특징은 '독대보고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누가 대통령과 가장 자주 독대하느냐에 따라 권력의 서열이 매겨졌는데 지금은 이러한 '독대보고'가 없어졌다고 한다.

"국정원장이 보고할 때도 항상 비서실장이나 관련부처 담당자가 배석합니다. 독대보고의 위험성이 얼마나 큰지 노대통령은 잘 알고 있습니다. 대통령이 모든 것을 다 알 수는 없어요. 만약 독대보고가 가능하다면 보고자 입맛에 맞는 보고서를 써서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이를 듣고 대통령이 곧바로 결정지어버리면 끝나는 것이죠. 돌이킬 수 없습니다."

독대보고가 없어졌다는 것은 이광재 전 국정상황실장의 경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실장은 청와대에서 근무하던 지난 8개월 동안 독대보고는 단 한 번도 없었고 배석자가 있는 가운데 총 여덟 번 정도 대통령과 만났다고 얘기한다.

노대통령은 오래 전부터 참모를 운용하는 데 있어 어떤 한 참모에게 과도한 권한을 한꺼번에 부여하는 스타일이 절대 아니라고 한다. 모든 참모가 동등한 위치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고 동등하게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켜 신뢰를 획득해 나가는 스타일이다. 주변 참모들의 생일이나 경조사를 꼬박꼬박 잘 챙긴다거나 고생했다고 따로 불러 뭘 챙겨주거나 하는 스타일이 결코 아니기 때문에 가끔은 잔정이 없는 보스로 통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현재 청와대 참모들 중 대통령과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누구일까. 또 대통령의 복심을 가장 잘 이해하고 읽는 사람은 누구일까.

우선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은 문희상 비서실장이다. 비서실장은 우선 거의 모든 회의에 배석한다. 상의할 일이 있을 때 우선 가장 먼저 찾는 사람도 바로 문실장이다. 다음으로 문재인 민정수석과 유인태 정무수석이 대통령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는 참모들이다.

특히 유수석은 노대통령의 복심을 가장 잘 읽고 이해하는 참모로 알려져 있다. 서비서관의 설명.

"노대통령과 유수석은 야권통합 시절부터 3당합당, 1992년 대선, 통추를 거치면서 거의 같은 정치적 궤적을 걸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대통령이 이런 부분은 어떻게 생각하실까' 혹은 '이것은 한번 여쭤봐야 하지 않을까'라는 부분이 있잖습니까. 그런데 유수석은 대체로 그것을 대통령에게 특별히 확인하지 않아도 거의 노대통령과 비슷하게 읽고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고통스러운 과거의 기억>

= 정몽준의 배신과 노무현의 일갈

"실패한 후보가 될지언정 실패한 대통령이 되지는 않겠다."

2002년 12월18일 저녁 9시40분쯤 노대통령은 서울 관악구 사당쪽에서 마지막 표심 잡기에 여념이 없었다. 당시 노후보의 수행비서였던 여택수 씨는 당관계자로부터 급보를 전해들었다.

"정몽준 대표가 노후보 지지를 철회한다는 공식 발표를 김 행 대변인이 곧 한답니다. 빨리 노후보를 당사로 모시고 오세요."

여비서는 이 청천벽력 같은 비보를 곧바로 노대통령에게 전달했다. 노대통령은 곧장 사당에서 여의도 당사를 향해 출발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10시25분쯤 당사에 도착한 굳은 표정의 노대통령은 당사 8층의 후보비서실장실로 곧바로 들어가 신계륜 비서실장 등 의원 10여 명과 긴급대책회의에 들어갔다.

10시30분 국민통합21의 김 행 대변인은 당사에서 긴급기자회견을 갖고 지지 철회를 공식 발표했다.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민주당 중진 의원들은 모두 노대통령께 당장 정몽준 대표를 만나러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빨리 정몽준 대표를 만나 설득해야 합니다. 지지 철회 선언을 철회하라고…."

"가지 않겠습니다. 이제 늦었어요. 가서 무엇을 하겠습니까."

"가야 합니다. 무조건 가셔야 합니다."

"됐습니다. 하늘에 맡깁시다."

"상황이 그렇지 않아요."

"실패한 후보가 될지언정 실패한 대통령이 되지는 않겠습니다."

당에서는 온통 난리가 났는데 노대통령은 단호했다. 그가 던진 마지막 말 "실패한 후보가 될지언정 실패한 대통령이 되지 않겠다"는 것은 무슨 뜻이었을까.

서비서관의 설명이다.

"노대통령은 이미 상황을 돌이킬 수 없다고 판단하셨어요. 김대중 대통령이 DJP 연합으로 대선에서 승리했지만 결국 거기에 발목잡혀 국정 후반기에 얼마나 애를 먹었습니까. 아마 당시 노대통령은 그런 것을 염두해 두셨던 것 같습니다."

사실 국민통합21측에서는 단일화 이후 끊임없이 대선 후를 기약하는 '합의 문서'를 요구해 왔다.

"소위 권력을 나누자는 것이었죠. 물론 노대통령도 대선 후 정몽준 대표를 홀대할 수 없는 처지였지만 그렇다고 그런 것을 합의 문서로 남기는 것은 끝까지 반대했습니다. 소위 국무위원 중 통합21측 몫으로몇 명, 이런 식은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이었죠."

노대통령은 '합의 문서' 요구를 끝내 반대했지만 참모들의 입장은 그렇지 않았다. 참모들은 대선 승리라는 최종 목표를 위해 우선 통합21측의 요구를 다 받아들이자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노대통령은 끝내 이런 참모들의 건의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당시 노대통령은 이렇게 얘기하며 참모들을 무마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 내내 DJP 연합의 업보를짊어지고 가느라 얼마나 힘들어 했는가. 나는 절대 그러한 전철을 밟고 싶지 않다. 그때는 정권교체라는대의를 위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기득권을 포기하고 당당히 후보단일화에서 승리한 정통 후보 아닌가."

그러나 민주당사 후보실에서는 당 중진들의 설득이 계속됐다.

"무조건 갑시다.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에요."

지루한 버티기 끝에 노대통령은 결국 거의 끌려가다시피 억지로 당사를 나섰다. 김원기.정대철 의원이 거의 팔짱을 끼다시피해서 억지로 차에 태웠다.

자정이 다 된 시간 당사를 출발한 차량 행렬이 20분후 평창동 정몽준 대표 자택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끝내 정대표는 노대통령에게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속은 쓰렸지만 카메라 기자들 앞에서 억지로 쓴웃음을 지어 보이던 노대통령은 결국 명륜동 집으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다시 서비서관의 말.

"노대통령은 댁으로 돌아가시고 저는 당사로 돌아왔어요. 뭔가 방법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러다 최후의 방법으로 당사에 남아 있던 각 방송국 카메라기자들과 상의했어요. 내놓고 방법을 좀 가르쳐달라고 했죠. 그때 한 기자가 "새벽에 나와 기자회견을 하라"고 조언하더군요. 그리고 그 화면이 투표일 내내 반복적으로 나가면 동정론이 일지 않겠냐고요. 그리고 노대통령은 될 수 있으면 면도도 하지 말고 초췌한 모습이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서비서관은 즉시 노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상의했다.

"오전 5시에 당사에 나오셔서 긴급 기자회견을 하셔야 합니다."

"그럴 필요 없네. 하지 않겠네."

노대통령은 또 고집을 부렸다. 결국 투표 당일 새벽 5시쯤 김원기 의원 등이 직접 명륜동 자택을 찾아노대통령을 억지로 끌고 당사로 나왔다. 5시30분쯤 당사에서는 긴급 기자회견이 열렸다. 원고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다. 노대통령은 짤막한 기자회견을 마치고 투표소로 향해 투표를 한 후 다시 명륜동 자택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했다.

오전 11시쯤 서비서관은 다시 노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정대로 고향에 가셔서 성묘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지금 전국적으로 동정론이 일고 있답니다."

"그럴 필요까지 있겠나?"

"아닙니다. 중간 출구조사에서 아주 근소한 차이로 뒤지고 있는데 동정론이 일어 승산은 있습니다. 꼭 가셔야 합니다."

결국 노대통령은 이날 2시 비행기로 고향에 내려가 성묘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이날 밤 늦게 극적으로 당선이 확정되었다. 서비서관은 노대통령을 모시고 명륜동 자택으로 갔다.

"집에는 건호.정연이와 건호의 약혼녀와 친구들이 몰려와 있더라고요."

노대통령은 차나 한잔 하고 가라며 서비서관을 붙잡았다.

"갑원 씨, 담배나 한 대 주게."

대통령은 비로소 긴장이 풀리는 모양이었다. TV를 지켜보던 노대통령은 미소를 지으며 "저런 장면도 있어나? 허허…"

12월18일 지지 철회 이후 급박했던 24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노무현의 분노 부른 참모들의 '잘못 된 계산'

1995년 부산시장선거. 서갑원 비서관의 말.

"당시 서울에서는 조 순 씨가 시장선거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노대통령에게 한 가지 제의를 했습니다. 시장선거를 같이 치르자는 것이었죠. 당시는 부시장 제도가 없었지만 러닝메이트로 나가자는 것이었어요. 그러나 노대통령께서는 이런 제안을 뿌리치고 부산으로 내려가셨습니다. 부산에서 승리해야 다음 대선 때 꼭 정권교체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죠."

막상 선거운동에 들어가자 예상 외로 노대통령의 지지도는 높았다. 거의 모든 언론사 여론조사에서 상대 후보를 약 10%차이로 앞서며 승리가 예견됐다. 그러던 중 노대통령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DJ의 지역등권론이 퍼지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6 ̄7% 지지도가 빠지기 시작했다. 노대통령 선거캠프에서는 정신이 없었다. 서비서관의 증언.

"당시 캠프의 거의 모든 이들이 당장 탈당 선언을 해야 한다고 노대통령을 설득하기 시작했어요. 그렇지 않으면 선거에서 100% 진다는 결론이 나온거죠. 무소속으로 남은 선거를 치르자는 것이었는데 노대통령께서는 완강했어요."

노대통령의 당시 생각은 어떤 것이었을까. 서비서관의 기억.

"어차피 부산시장선거를 처음 시작할 때 조 순 서울시장선거 들러리 아니었던가. 부산시장 한번 돼보겠다고 무소속으로 출마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정치를 혼자 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지금 여기서 민주당을 탈당하는 것은 노무현식 정치도 아니고 자칫 서울시장선거에도 악영향을 미칠지 모른다. 조 순 시장이라도 당선시켜 정권을 바꾸어야 한다. 나 혼자 당선하자고 나선 선거가 아니다."

선거전이 막판으로 치닫자 참모들은 답답했다. 이대로 질 수만은 없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결국 유세 때 DJ를 강력하게 성토할 수밖에 없었다.

"DJ를 성토할 찬조연설자가 필요했어요. 서울에서 한 분 초빙하려고 했는데 노대통령께서는 '그러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러나 참모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선거를 이대로 망쳐버릴 수는 없었으니까요. 결국 노대통령 허락도 없이 이모 의원을 찬조연설자로 초대했어요."

찬조연설자로 나선 이의원은 연설 초반부터 DJ를 강력하게 성토했다. 그날 저녁 9시 뉴스에 이 상황이 크게 보도됐다. '노무현 선거유세에서 DJ 강력 비판'이런 제목이었다.

노대통령은 참모들의 경솔한 행동에 크게 화를 냈다. 서비서관의 기억.

"노대통령을 모시면서 그렇게까지 화를 내신 것은 처음 봤습니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어휴~."

당시 노대통령이 참모들을 혼내면서 했던 말이다.

"정치를 편협하게 하지 말아라. 설사 지더라도 본연의 자세를 지켜야지. 당장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는그런 정치는 안 된다. 나이를 먹어도 내가 자네들보다 한 살이라도 더 먹었고, 정치를 했어도 내가 자네들보다 1년이라도 더 많이 했는데 자네들은 어떻게 그렇게 보수적이고 현실타협적인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이 때 노대통령이 했던 이 말들은 아직도 서비서관의 가슴 속 깊이 박혀 있다고 한다. 결국 노대통령은 낙선의 쓴맛을 봤다. 서비서관은 1995년 6.27 지방선거 직후에 있었던 일화를 하나 더 들려주었다.

선거에서 떨어진 후 승용차편으로 노대통령을 모시고 상경하던 길이었어요. 제가 옆자리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제 다리를 툭 치면서 하시는 말씀이 '갑원 씨, 내가 이번 대선에서도 또 DJ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뛰어다녀야 하겠지?'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다 의원님 팔자 아니겠습니까'라고 대답했어요.

서비서관의 대답에 노대통령은 "그렇지 뭐…그럴 수밖에 없겠지…"라며 독백하듯 내뱉었다. "내가 DJ 한 사람만의 뜻이라면 어떻게 해서든지 설득하고 꺾을 텐데 전라도 사람들이 마지막 불꽃을 태우겠다고 각오하고 준비를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꺾을 수 있겠어. 다시 한번 손잡고 갈 수밖에 없지 않겠나"하는 것이었다.

서비서관의 회고.

"당신 선거에서 떨어진 직후, 그것도 세상 모든 사람들이 DJ 때문에 떨어졌다고 말하던 그 부산시장선거 직후 DJ를 도와 호남인들의 뜻을 다시 한번 세우자고 넉살좋게 말할 수 있는 현실정치인이 과연 몇이나 될 것 같습니까.말이 좋아 지역통합이지 그렇게 간단하거나 쉽게 할 수 있는 얘기가 아닙니다."

<대통령의 실수와 인간적 면모- 권양숙 여사의 명령 "정지!">

노대통령은 유난히 유머 감각이 풍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직설적인 표현과 풍자와 비유에 능해 좌중을 잘 웃기는가 하면 가끔은 이로 인해 주변으로부터 오해를 받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 때로는 노대통령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던 부지불식간에 생기는 실수로 참모들과 주변 사람들이 실소를 금치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지난해 3월11일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장. 노대통령은 전체 생도들이 대통령에게 경례를 했는데도 답례를 깜박 잊고 연설을 하기 위해 '열중 쉬어'를 지시했다. 군에서는 지휘관이 연설이나 지시 사항을 하달할 때 정렬해 있는 부하들에게 반드시 '열중쉬어'를 시킨다. 잠시 어색함이 흐르자 노대통령은 "제가 몇 년 동안 경례 연습을 했던 사람인데 기왕에 열중쉬어까지 했으니 그냥 가자"며 재치있게 상황을 수습했다. 육군 제3사관학교 졸업식에서는 '열중쉬어'를 하기 전에 치사를 시작했다가 멈춘 적도 있다.

또 김종환 합참의장 등 6명에 대한 진급 및 보직신고 때는 별 계급장은 서열대로 달아 주었으나 악수는 역순으로 하는 실수를 했다.

며칠 후 경찰대 졸업식에서는 노대통령이 다른 사람을 '경호'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행사를 마치고 차를 타러 가는 도중 앞서 가던 모 경찰 간부 부인이 서 있는 차에 부딪칠 뻔하자 노대통령이 재빠르게 움직여 사고(?)를 막았다.

서비서관의 말.

"사관학교 졸업식 때는 경례 순서에서 빠뜨리고 해서 정말 어쩔 줄 몰랐습니다. 경례 순서가 좀 많습니까. 시나리오 대로 연습한다고 했는데…. 그게 외운다고 될 일도 아니고. 나중에 노대통령께서 쑥쓰러우셨는지 '그거 잘 안 되대, 다음에는 잘 할게' 하시더라고요.

서비서관은 노대통령이 아직까지도 잘 고치지 못하고 자주 실수하는 것이 하나 있다며 재미 있는 일화를 들려주었다. 권양숙 여사와 함께 참석하는 행사에서 자주 나오는 실수다.

노대통령이 차에서 먼저 내려 기다린 다음 왼쪽 문에서 내린 권여사가 차 앞으로 돌아 대통령 옆에 서면 함께 행사장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종종 노대통령은 권여사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성큼성큼 걸어 혼자 행사장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걸음이 빠른 대통령을 따라가려면 권여사가 땀깨나 흘린다는 것. 그래서 의전비서관이었던 서비서관은 항상 노대통령이 차에서 내려 발걸음을 떼려고 하면 "대통령님!" 하고 주위를 환기시킨다고 한다. 멈추라는 뜻이다.

그래도 잘 고쳐지지 않자 결국 피해(?) 보던 당사자인 권여사가 대통령과 한 가지 약속을 했다는것. 먼저 가지 말라는 뜻의 신호를 정한 것이다. 요즘에도 종종 권여사는 먼저 가려는 대통령을 향해 이렇게 외친다.

"정지!!"

월간중앙=고성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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