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 기운 뻘밭 구장에서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노무현 대통령은 레토릭 구사에서 탁월한 경지를 보인다. 그는 최근 기자회견에서 대선 구장을 뻘밭에 비유했다. 그것도 평평한 잔디 구장이 아닌 기울어진 구장에서 위에서 아래로 내려 차는 불공정 경기를 하는 게 지난날 대선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정국도 5백 대 50의 뻘밭 싸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회창 캠프 측 불법 대선자금이 5백억원 이상이고 노무현 캠프 측은 그 10분의 1인 50억원에도 못 미친다는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마치 우리의 기억을 1년 전 대선 당시로 되돌리듯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고 있다.

*** 내년 총선까지 난투극 벌이면

새 대통령을 맞은 지난 1년 코드 맞추기와 언론과의 전쟁으로 한 세월 다 보내고 이젠 학습을 끝내고 나라 경제 살리기에 매진하는가 했더니 웬걸 국정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이, 국회 다수당인 야당이, 그리고 내로라하는 대기업들 모두가 대선자금 늪에 빠져 그야말로 진흙밭 혼전을 벌이고 있다. 어느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는 참담한 패자싸움이다. 이 혼전이 이른 시일 안에 끝나고 새롭게 거듭나는 계기가 된다면야 그나마 참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뻘 수렁이 그렇게 얕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밀고당기며 벌이는 혼전이 적어도 내년 4월 총선까지 진행될 때 이 나라 장래가 과연 어떻게 될 것인가.

왜 지금의 대선자금 정국을 뻘밭 싸움으로 볼 수밖에 없는가. 대선은 이미 1년 전에 끝났다. 승자와 패자의 판가름이 난 지 오래다. 패자는 곧바로 정계은퇴를 선언했고 정치에서 확실히 손을 뗐다. 그런데 다시 승자가 패자를 물고 늘어지고 있다. 승자의 아량도 보이지 않고 패자의 다소곳함도 사라졌다. 악에 받친 패자가 죽기를 각오하고 승자에게 다시 한판 싸움을 하자고 대든 형국이 지금 정국이다. 지난 대선이 뻘밭의 불공정 경기였다면 승자 입장에서 지난 경기의 불공정성을 복기(復棋)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뻘밭 경기장을 잔디 구장으로 만드는 데 진력하자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어야 했다. 기울어진 경기장이었다면 평평한 구장으로 어떻게 만들지 법과 제도를 바꿔 다음 경기는 제대로 치르자는 쪽으로 승자의 아량과 금도를 보이면서 정국을 주도했어야 했다. 그러나 승자는 패자와 다를 바 없이 10분의 1의 유리함을 외치면서 다시 뻘밭 경기장에 패자와의 재경기를 펼치고 있다. 이래도 되는가.

지난 대선에선 마이너리티에 속했던 후보였지만 지금은 대통령이 된 승자가 지금 구장을 평평한 잔디 구장이라고 말해선 안 된다. 아무리 검찰권과 국정원의 권한에서 손을 떼고 있다지만 대통령의 권한은 막강하다. 또 대통령이 임명한 검찰 수뇌가 이 경기의 심판을 맡고 있는 판에 이 경기를 공정 게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제 아무리 독립성과 공정성을 확보하고 있는 검찰이라지만 현직 대통령의 대선 비자금을 그렇게 훌훌 털어낼 수 있는가. 털어내지 못해도 걱정이고 털어내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다. 승자의 비리 50은 패자의 부정 5백에 결코 못지않다. 오히려 그 무게와 부담은 더 무거울 수 있다. 또 이미 기울어진 구장에서 벌어지는 경기를 평평한 구장 경기라고 외쳐봤자 관중이 경기 결과를 믿지 않게 돼있다.

이 뻘밭 구장의 난투극을 어떻게 빨리 끝낼 것인가. 결자해지다. 묶은 자가 풀어야 한다. 패자 아닌 승자가 풀어야 한다. 승자가 뻘밭 경기를 자초한 것은 패자의 지난 불공정 경기를 까발려 총선에서 뭔가 이득을 보자는 얕은 수에서 출발한 게 아닌가. 지금대로의 형국이라면 이 수가 먹히기 어렵게 돼있다. 수천만 관중이 두 눈 치켜뜨고 보고 있다. 명백한 반칙에 심판인 검찰 또한 휘슬을 불지 않을 수 없게 돼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뻘밭 경기에서 누가 더 공정했느냐에 있지 않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뻘밭 구장에서 발을 빼고 나와 새롭고 파란 잔디 구장을 만들도록 방향을 틀어야 한다.

*** 다시 주워담기는 지금이 찬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과거의 늪에서 벗어나 미래의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데 진력하는 것이다. 과거의 죄와 벌에 지나치게 몰두하다가는 제 갈길마저 잃어버린다. 이미 그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 대통령이 다시 주워담기는 늦었다고 할 게 아니다. 지금이 오히려 적기다. 4당 대표가 다시 모여 과거 비리를 스스로 고해하고 내일을 위해 이렇게 하겠다는 대국민 호소를 해야 한다. 대통령이 이 일에 앞장서야 한다. 그것이 승자의 도리고 최고 국가경영자가 해야 할 정도(正道)다.

권영빈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