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중순에야 사건 알았다”/제일생명 하영기사장 인터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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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사회·대표 결재도 없이 윤 상무가 계약/천억까지는 임원이 집행·사후보고 가능
정보사부지매입 사기사건에 휩쓸린 제일생명 하영기사장(66)은 5일 밤 수면제를 먹고 잠을 잤다.
제일생명의 대주주인 조양상선그룹 박남규회장의 3남인 박재복 진주햄사장이 장인 하 사장에게 수면제를 주었다는 것이다. 사건발생후 처음으로 6일 아침 서울 방배동 자택에서 기자와 만난 하 사장은 숙면때문인지 그다지 초췌한 모습은 아니었으나 껄그러운 질문이 나올 때마다 표정이 찡그러졌다.
하 사장은 시종 이번 사건은 윤성식상무 개인이 벌인 일이며 자신도 피해자임을 강조했다.
다음은 기자와의 일문일답.
­이 사건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나.
▲전혀 몰랐다. 지난 6월 중순께 바뀐 자금담당임원이 업무인수·인계후 보고하는 과정에서 전임 윤 상무가 혼자 부지를 계약하고 예금·어음발행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후부터 관련조치는 내가 직접 내렸다. 지난달 25일 정보사부지 사기극이 보도된후 고소·어음사취계 신청도 내가 결정했다.
­윤 상무 혼자 사장결재없이 수백억원이 드는 계약을 할 수 있는지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되는데….
▲회사 사옥부지 계약문제라면 당연히 이사회 결의를 거쳐야 하고 대표 결재도 받아야 하는데 그 과정이 생략됐다. 이는 어디까지나 윤 상무 개인의 계약이다.
­계약은 그렇다치고 그만한 자금 집행을 위해서는 사장의 결재가 있어야 할텐데….
▲(격앙된 어조로) 2조6천억원의 자산을 가진 회사라면 자금담당 임원이 최대 1천억원까지의 자금은 먼저 집행하고 사후보고하는 일이 흔히 있을 수 있다. 또 모든 임원들은 업무편의를 위해 사장직인을 가지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몰랐던 일이며 나또한 이 사건의 큰 피해자다.
­혹시 윤 상무가 하 사장을 제치고 다른 고위경영층과 이 일을 은밀히 추진한 것이 아닌지. 예를 들어 그룹오너라든지….
▲(회장과의 관계를 의식한듯 황급히 말을 막으며) 절대 그렇지 않다. 윤 상무 혼자 벌인 일이다.
­국민은행에 예치된 2백30억원은 몰랐나.
▲1월 중순께 우연히 2백억원 넘는 돈이 이자도 적은 보통예금에 들어있는 것을 보고 당장 빼서 옮기라고 했다. 이 돈이 부지계약과 관계있다는 생각은 못했으며 그후론 확인해보지 않았다.
­정보사 부지에 대해서는 언제 알게 됐나.
▲작년에 사옥부지로 점찍어온 서초전철역 입구 골프연습장부지(정보사 입구와 1백m 거리·편집자주)가 매입이 잘 안돼 고민하던 차에 연말께 윤 상무가 정보사 땅을 사주면 골프장부지를 대신 사서 맞바꿔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고 했으나 군부지 매입이 그리 쉬울리 없다고 판단,응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 제안을 했다는 사람은 누구인가.
▲문제의 사기단인 것 같다. 제안이 솔깃해 윤 상무가 계속 추진했던 것 아닐까.
­예금인출과 관련,제일생명·국민은행의 주장이 엇갈리는데 어떻게 할 계획인지….
▲매달 받아놓은 잔고증명이 있기 때문에 진실을 밝힐 수 있다. 안되면 소송을 해서라도 돈을 받아내겠다.
­어음 사취계 신청으로 어음 보유자들의 피해가 클텐데.
▲우리가 국민은행에 당한 피해와 같은 논리다. 역시 법(소송)으로 해결할 문제다.
­마지막으로 한은총재까지 지낸 분으로 이런 사건을 겪게 된 소감은.
▲(침울한 표정으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 평생 큰 과오없이 살아오다가 졸지에 오점을 남기게 됐다. 공신력있는 금융기관에 이런 부끄러운 일이 생겨 고객·관계당국 모두에게 죄송하다. 사기가 땅에 떨어진 직원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다. 수사결과가 나오고 사건의 내막이 밝혀지면 나 자신을 포함,책임을 규명하겠다.<이재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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