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증 못 댄 외국인 범죄수사(촛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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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곱슬머리에 오똑한 콧날,콧수염이 잘 어울리는 임란 사자드씨(23) 등 검은 피부의 파키스탄인 13명이 25일 오후 서울형사지법 법정에 푸른색 수의를 입고 섰다.
이들은 「비키파」와 「주비파」라는 라이벌 폭력조직을 결성,국내에 들어온 동족들의 등을 치다 3월 서울 이태원과 성남에서 상대파 조직원 3명을 무참히 찔러죽이는 보복살인극을 벌인 혐의로 구속기소됐었다.
이들은 입국한지 평균 3∼6개월이 된 불법체류자들로 인쇄공장 등지에서 일하거나 동료들에게 일자리를 알선하고 돈을 뜯어왔다.
몇몇은 벌써 국민학교 1학년 수준의 우리말을 깨쳐 『교도관님,식사하셨어요』라고 또렷하게 인사할 정도.
그러나 심문에 응할 정도는 아니어서 영어를 하는 파키스탄 대사관직원이 변호인석에 앉아 통역을 해야했다.
­3월28일 새벽 피해자 2명을 성남으로 끌고간뒤 야산에서 식칼로 찔러죽인 사실이 있는가.
『그런적이 없을 뿐더러 모두다 꾸며낸 일이다.』
­그러면 왜 경찰과 검찰에서는 혐의를 시인한뒤 조서에 날인했는가.
『날인한 사실은 있으나 한글조서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용,검사와 경찰이 멋대로 날조한 것이 틀림없다.』
수사기관에서 순순히 범행을 자백했던 파키스탄인들이 하나같이 모든 범죄사실을 부인하자 담당검사의 얼굴이 굳어졌다. 범인들이 돌변하리라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담당검사는 『현재로는 시체외에는 물증도,증인도 없는 상태』라며 『지금부터 증거를 찾아야겠다』며 심각한 표정. 「죽은자는 말이 없다」는 격언대로 시체외의 다른 증거가 없다면 자칫하면 한때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던 파키스탄인 폭력배들이 무죄로 석방될 수도 있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검찰이 불법체류자라는 편견에 싸여 선량한 이국청년들을 살인범으로 몬 것인지,아니면 이들이 이국땅에서 동족을 죽이고도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원점으로 되돌아간 검찰이 어떻게 이 난제를 풀어나갈 것인지 궁금했다. 국제화시대에 범죄수사도 국제화가 시급한 때임이 분명해졌다.<남정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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