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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훈범시시각각

임금이 남한산성에 있다, 병사는 집에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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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소설은 병자호란 당시 임금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청 태종 홍타이지 앞에 한 번 절에 세 번 땅에 머리 찧기를 세 차례 반복하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로 항복하기까지 47일간의 기록이다. 날 샌 명분과 치욕의 실리를 다투는 말들의 향연이 소설의 뼈대를 이루지만 당시 조선은 명분은커녕 치욕이란 말도 사치스러운 수레바퀴 앞 사마귀였다.

성 안 백성은 굶어 죽고 얼어 죽고 성 밖 백성은 도륙당하고 능욕당하는 와중에 명분과 실리 싸움이 얼마나 가치 있었는가는 이 글의 주제가 아니다. 초기 강한 군사력을 가졌던 조선이 왜놈들에게 짓밟히고도 정신 못 차리고 30여 년 만에 여진 오랑캐한테 또다시 얻어터진 가장 큰 이유가 뭐냐는 게 관심이다.

조선 전기만 해도 현직 관료와 학생을 뺀 모든 남자들이 군역을 담당하는 양인개병제(良人皆兵制)가 단단했다. 16~60세 남자면 군인이 되거나 병참을 지원하는 봉족(奉足)이 돼야 했다. 왕의 친척이나 공신, 고위관료의 자제라고 예외가 없었다. 따로 국왕 호위나 왕궁 경비를 맡았다. 부동산이 많은 부자일수록 더 큰 군역 부담을 졌다. 경제력 있는 사람이 군인이 됐고 빈약자는 봉족을 시켰다. 가진 자가 못 가진 자보다 국가에 더 많이 봉사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제도적으로 확립돼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세종 때는 군사동원 능력이 100만 명에 달했다. 여진과 쓰시마 정벌이 그래서 가능했다.

하지만 중종 이후 사림(士林)이 득세하면서 돈과 베로써 병역을 대신하는 못난 풍조가 생겼다. 대역(代役)과 수포방군(收布放軍)이다. 사회지도층인 사족들이 독점적인 부와 특권을 이용해 병역 의무를 회피하려 한 것이다. 양인개병제는 무너졌다. 힘없고 '빽' 없는 백성들만 군역에 멍들었다.

오늘의 모습과 흡사하지 않은가. 역사는 진보하지 않는다. 사지 멀쩡한 장정이 군대 안 가고 덜 가는 방법이 여럿이지만 요즘 검찰이 수사하고 있는 산업기능요원 병역특례만 봐도 요지경이다. 자격미달자나 친인척 선발, 특례자 근무시간 조작과 근무지 이탈, 채용 미끼의 금품 수수나 납품가 할인, 이를 알선하는 사설 학원…. 서류로만 존재하는 유령 업체에서 근무하는 장정도 있고 특례업체들끼리 남은 정원을 팔고 산다. 비리는 가지가 많고 뿌리도 깊다. 그 가지마다 사회지도층 자녀와 유명 가수, 운동선수들이 걸렸다. 힘없고 '빽' 없는 청춘들만 병영 그늘에서 얼을 차린다.

비리를 없애기 위해 병역제도 전반의 개선과 개혁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걸로 뿌리가 뽑히리라 여겨지지 않는다. 직접 호소하는 게 낫겠다. 젊음들아. 부모에게 군대 빼달라고 징징대지 말고, 어떡하면 몸이 편할까 잔머리 굴리지 말고 현실과 폼 나게 '맞짱' 떠보자. 살아보니 인생에 2년은 별 게 아니더라. 인생의 황금기는 입영통지서를 받을 때만이 아니다. 깎은 머리에 가리마가 타질 무렵이면 또 한 번 황금기는 온다. 현명한 사람은 진창에 빠져서도 기회를 보고 바보는 기회 앞에서 점심 메뉴나 고르는 법이다.

김훈은 머리말에 썼다. "밖에서 싸우기보다 안에서 싸우기가 더욱 모질어서 글 읽는 자들은 갇힌 성 안에서 싸우고 또 싸웠고…." 지금이 그렇게 보이지 않는가. 이럴 때 병사가 출근부 도장 찍고 집에 앉아 있으면 남한산성이 또 한 번 우리의 현실이 될 수 있잖겠는가.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