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원 “예산 투쟁”각 부처|읍소… 담판형 등 각양각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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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되로 주고 말로 받기.」
매년 「예산투쟁」에 나서는 각 부처 예산담당자들이 경제기획원 담당자들을 상대로 펼치는 작전이다.
학연·지연·혈연 등을 총동원하고 점심·저녁대접에 술자리까지 마련하는 등 예산확보를 위해서라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써보지만 결코 쉽지 않다.
올해는 기획원 측이 『경기불황으로 세입이 신통치 않아 예산배정이 예년보다 더 어려울 것』이라고 미리 선수를 치고 나오는 바람에 그렇지 않아도 고달픈 예산 담당자들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예전에는 부처별로 예산을 배정하고 난 후 떨어지는 자투리예산이라도 서로 따내기 위한 소위 「이삭줍기」라는 남만이라도 있었으나 이제는 예산배정도 컴퓨터로 하는 바람에 이마저도 없어져버렸다.
지난 1일부터 부처별 예산심의가 시작된 과천정부종합청사1동 경제기획원 예산실 앞은 마치 종합병원 환자대기실을 연상시킨다.
대여섯 시간을 기다려 겨우 담당자를 만나면 고작 10여분 설명하고 끝이다.
보충실명이라도 할라치면 일그러지는 담당자의표정에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야하고 자연히 『쥐뿔도 모르는 게, 지가 뭔데…』 『유도선수나 한 명 데려와서 탁 메어다꽂았으면 좋겠다』는 불만이 튀어나오기 일쑤다.
80년대 중반 법제처 예산담당을 했던 한 사무관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씁쓸한 기억이 있다.
밤새도록 정리해 제출한 관계자료를 담당주사가 거들떠보지도 않고 연필로 그어버려 점은 혈기에 멱살 잡이를 하고 욕설을 퍼부었으나 곧 소속부 전체에 악영향을 미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이래저래 설움이 북받쳐 그 자리에서 통곡을 해 버렸다.
마침 지나가던 예산실장이 이 모습을 보고 『웬만하면 해 주라』고 해 결국예산은 깎이지 않았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각 부처에서 예산을 확보하기 위한 작전은 다양하다.
하소연해서 물고 늘어지는 「읍소형」은 가장 보편적인 형태지만 효과는 그리 크지 않다.
23일 오후 보사 예산 담당관 실을 찾은 보사부의 한 여사무관은 『아무리 우는 시늉을 해도 목석 같다』며 『이럴 땐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라고 하소연했다.
학연·지연·혈연 등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물을 동원하는 「동원형」도 많이 애용하는 방법.
예산실 담당자의 고시동기나 학교동창을 내세우는 것은 물론이고 기획원 출신을 적시적소에 써먹기도 한다.
교육부의 기획예산담당관은 기획원 출신이라는 「안면」덕을 톡톡이 본 경우로 당시 기획원 담당자로부터 『기획원에서 주는 지참금으로 생각하라』는 단서와 함께 88년 정박아 학교설립 예산 50억 원을 거뜬히 따냈다.
보사부는 박청부 차관이 직전 기획원 예산실장이라는 이점에 기대를 걸지만 정작 박 차관은 『골키퍼에서 센터포워드로 입장이 바뀌고 보니 참 힘들다』고 어려움을 토로한다.
환경처도 마찬가지로 평소 『환경예산이 너무 부족하다』고 얘기해온 한갑수 차관이 기획원차관으로 자리를 옮겼기 때문에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걸고 있다.
최병렬 노동부장관은 「담판형」의 대표선수.
문공부장관시절 1천억 원의 문예진흥기금조성계획에 제동이 걸리자 직접 부총리와 담판, 2백50억 원을 확보했고 노동부로 옮겨서는 기획원 예산실장·차관·부총리를 차례로 만나 산업보건연구원 설립을 관철시켰다.
교통부·교육부·보사부는 사업의 중요성을 언론에 흘려 「이 사업은 꼭 이뤄져야 한다」는 간접적인 압력수단으로 사용하는「언론플레이형」이다.
예산담당을 해본 공무원들은 다시 예산을 맡으라고 하면 절대사절이다.
4월부터 예산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11월까지 일요일이나 휴가를 찾아먹겠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말아야 하고 툭하면 야근에다 기획원에 가서 서류까지 정리해주는 「사역병」노릇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예산작업이 끝나더라도 내후년을 생각해 기획원 담당자들을 계속해서 접대하는 임무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손장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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