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의경의 가혹한 근무조건(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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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올해 들어서만 기합과 구타 등에 견디지 못해 자살을 기도한 전·의경이 10여명에 이르고 가혹행위 등으로 처벌을 받은 숫자도 1백54명이나 된다는 소식은 가볍게 보아 넘길 문제가 아니다.
개선대책도 물론 필요하지만 그에 앞서 이런 시대착오적인 상황을 묵인 내지 조장한 경찰수뇌부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그런 충격적인 조치를 않고서는 설사 개선대책이 마련된다 하더라도 결코 일선의 분위기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들은 지난날의 군대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다.
언제는 살인적 기합과 구타가 합법적이었던가. 아무리 엄격한 제도와 규칙을 마련해도 지키지 않으면 그뿐이며 지키지 않아도 처벌을 받지 않거나 처벌을 해도 그것이 형식적인데 그칠때 제도나 규칙은 있으나마나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제도개선에 앞서 문책이 요구된다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책임추궁을 통해 수뇌부부터,자신의 보신을 위해서라도,기합과 구타를 없애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할 때라야만 비로소 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
표면화된 통계숫자가 저러할 때 실제로는 얼마나 많은 가혹행위가 저질러지고 있을까 하는 것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거리를 지나다 보면 많은 시민들이 지켜보고 있는데도 기합과 구타를 당하는 전·의경들이 흔히 눈에 띈다. 시위때 보면 마치 전쟁에서의 독전대처럼 상급자들이 진압경찰의 뒤에 자리잡고서 전·의경들을 곤봉으로 때리며 다그치고 있다.
전·의경의 근무실태가 이러하니 의경지원자가 격감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올 상반기에 경찰청은 1만8천여명을 모집할 예정이었으나 지원자가 지난달말까지 불과 5천명밖에 안돼 연중지원을 받기로 하는 한편 군입대자중 일부를 강제 차출할 것을 검토하는 등 궁지에 몰려 있는 형편이다.
물론 경찰로서도 할 말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시위는 막아야 하고 시위를 막자니 엄한 기율이 필요해 기율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지나친 기합과 구타가 생긴다고 변명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러한 사고방식과 논리가 살인적 기합과 구타를 낳게 해 자살기도사건까지 빚어내는 근본바탕이다.
집회 및 시위의 자유가 헌법에 국민의 기본권으로서 엄연히 보장돼 있고 개정된 집시법도 있는데 왜 걸핏하면 원천봉쇄고 집시불허인가.
시대가 변한만큼 경찰의 사고와 행태도 달라져야 한다. 폭력시위와 폭력진압은 악순환적 관계이지만 그 고리를 끊는 길은 경찰이 먼저 집시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또 사회의 갖가지 불합리와 모순에서 빚어지는 문제를 물리력에 의해 다스리려 하고,다스릴 수 있다는 생각도 고쳐야한다. 전·의경의 불합리한 근무조건은 과감히 혁신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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