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영 가족 소설 - 즐거운 나의 집 [3부] 가을(4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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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그림=김태헌

개학날이 왔다. 아침에 새로 산 교복을 입었다. 제복이란 건 참 이상하다. 나는 그제야 내가 학생이란 걸 얼마간 잊고 살았다는 생각을 했다. 동생들 모두가 개학을 하는 날이라 아침부터 연필을 깎았니, 신발 주머니를 챙겼니, 잔소리를 해대던 엄마가 내 방으로 들어왔다.

"엄마가 함께 가 줄까? 엄마 책을 두어 권 들고 선생님께 인사도 하고…."

나는 엄마가 누군가 낯선 사람에게 가서 제가 소설가 아무개입니다, 하고 말하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잠시 의아로웠다.

"…괜찮아. 둥빈이 처음 학교 들어가서 가정환경 조사란에 가명으로 이름 써넣었다가, 소문이 나는 바람에 둥빈이 몹시 창피해했어…. 네가 새 학교에 적응하는 데 엄마가 누구라는 걸 밝히는 게 혹시 도움이 된다면…. 괜찮아 위녕."

나는 머리를 빗다 말고 엄마를 바라보았다. 그게 도움이 될지 아닐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언젠가 중학교 때 그 사실을 밝혔다가, 내가 신발 주머니를 놓고 오거나 성적이 떨어지기만 하면 나를 "결손 가정의 문제아"로 심각하게 취급하는 선생님 때문에 일 년 동안 혼이 난 적도 있으니까. 그 선생님은 언제나, 내게서 불행의 기미만을 찾아내고 싶어했다. 아직도 그 생각을 하면 나는 힘이 든다. 생각해보시라, 준비물 하나 가져가지 않은 일로 상담실에 불려가 특별 상담을 받아야만 했던 나날을. 어른들은 아마도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은 신발 주머니를 챙길 때나 교과서를 준비할 때나 부모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새기면서 사는 줄 아나보다.

학교는 내 예상대로 재미없었다. 담임 선생님은 엄마 또래의 여자였는데 날 그냥 심드렁한 전학생으로 대해주었다. 나로서는 그게 편했다. 그날 나는 하굣길에 한 친구를 만났다. 키가 좀 작고 호리호리한 친구였다. 집으로 가려고 전철을 기다리고 있는데 그녀가 내게 다가와 말을 붙였다.

"내 이름은 쪼유야. 유명한 작가의 딸이 전학 온다기에 궁금했는데…."

평생 내게는 아마도 누구누구의 딸이라는 말이 떠나지 않겠지만, 별로 기분은 좋지 않았다. 나는 그냥 위녕이고 싶었다. 그냥 내가 나이고 나서 그 다음에 엄마는 누구고 아빠는 누구라는 말을 들어도 좋을 것 같았지만 이것 역시 한두 번 겪는 일은 아니었다. 엄마 말대로 피할 수 없으면 즐기는 것, 이다. 그게 비록 힘들지라도, 아니 정말 힘든 일이지만, 닥쳤으니 겪어내야 하는 것이고, 이왕이면 좋게 겪어야 한다고 엄마는 늘 말하곤 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은 엄마처럼 그렇게 매사에 체념하듯이 순응할 수는 없었다.

"그래…. 어쨌든 나는 위녕이야."

쪼유는 "알아. 이름이 참 특이해" 하더니, 문득 물었다.

"이혼한 엄마와 사는 건 어떤 일이니?"

쪼유의 말 속에는 비아냥이나 호기심 같은 건 없었다. 말투는 낮고 심드렁해서 나는 잠깐 이 아이가 지금 내게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생각해야 했다. 내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쪼유는 내 대답은 별로 기다릴 필요도 없다는 듯이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엄마, 삼 년 전쯤인가 한밤중에 내게 묻더라고. 쪼유, 아빠랑 엄마가 이혼한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니? 하고…. 그때 나는 너무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아빠도 미웠지만 엄마가 더 미웠지. 다른 집 엄마들도 다 참고 사는데 왜 엄마 혼자 잘난 척하는지…. 그런 생각도 좀 들었던 거 같아. 지금 생각하면 왜 엄마가 참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이상하지만, 어쨌든 그 후로 엄마 아빠가 냉전이나 열전을 할 때면 나는 늘 생각하곤 했어. 나는 누구와 살아야 하나, 그리고 내가 결정을 내리고 나면 내 동생은 나와 같은 생각일까? 하고. 너도 알지? 부모가 싸우면 이 세상에 믿을 인간 하나도 없는 기분이라는 걸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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