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하게 남느니 차라리 떠나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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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호 20면

Q.올 연말께 회사를 그만두라는 통고를 받을 것 같습니다. 공식적인 결정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습니다만 제가 해고대상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돈은 제게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연말까지 회사에 있고 싶습니다만, 회사가 공식적으로 요구하기 전에 미리 사표를 내버릴까 하는 마음도 듭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캐나다 토론토의 한 독자가 )

잭 웰치 부부의 성공 어드바이스④ 연말께 해고될 것 같은데…

A. 불안해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회사 동료들이 그런 당신을 대하는 데 불편한 눈치라면 당장 그만두세요. 그렇지 않다면 아주 천천히 형장으로 걸어가는 사형수처럼 마음을 가다듬고 업무를 정상적으로 처리하십시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예를 들어볼까요? 검사 8명을 해임한 사건과 관련해 사퇴압력을 받고 있는 미국 법무장관 앨버토 곤잘러스와 여자 친구를 위해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궁지에 몰려 있는 세계은행 총재 폴 울포위츠가 적절한 예입니다. 당신처럼 두 사람도 사직 압력을 받지만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려고 합니다.

사형수가 아주 천천히 형장으로 가는 그 순간에 집행명령이 취소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곤잘러스와 울포위츠가 해임을 면할 가능성이 아주 낮다는 말입니다. 물론 당신의 상황을 사형수 처지에 비유해 말한 것은 지나친 감이 있습니다. 그러나 요즘 기업은 곤잘러스나 울포위츠 같은 고위급 인사보다는 말단직원 또는 중간간부를 해고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사람이 해고될 것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당사자를 포함해 모든 조직원이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조직의 최고책임자는 공식적인 결정을 최대한 미루게 마련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다양합니다. 최고책임자가 법적 소송을 두려워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사람을 쫓아낼 배짱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조직원들이 뭔가를 보고 느끼도록 시간을 끌면서 해고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런 기간은 해고될 당사자에게는 잔인한 고통의 세월입니다. 그러나 최고책임자는 서둘러 방아쇠를 당겨버리기보다는 심사숙고합니다.

공식적인 해고 결정까지 조직 내 어색함은 사실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습니다. 형장으로 가야 할 사람이 속해 있는 부서는 당혹감ㆍ불편함 때문에 서서히 그러나 눈에 띄게 활력을 잃습니다. 특히 해고 대상자가 부장급 등 책임자라면 그 부서는 유탄이 어디에 떨어질지 촉각을 곤두세우는 바람에 조직 전체가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반발 또는 동요의 소용돌이가 일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형장으로 끌려가고 있는 이에게 동정심을 갖게 마련입니다. 거칠게 항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제심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아무튼 해고 대상자가 있는 조직은 어색하고 가라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때로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행동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직의 생산성은 당연히 떨어진다고 봐야겠지요. 총수가 해임압력을 받고 있는 미 법무부나 세계은행의 사람들이 요즘 열심히 일하기 힘들 것임을 누구나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조직이 우울하고 흔들린다면, 형장으로 가는 사람 자신은 더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곤잘러스와 울포위츠는 동료가 눈길을 돌리고 메시지를 남겼는데도 전화가 오지 않는 일을 겪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차분하고 냉정한 마음을 유지하기 힘들겠지요. 두 사람은 평소 충성스러운 척하던 부하 직원이 태도를 바꿔 모른척하는 일을 겪기도 할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고픈 의욕도 줄어들 뿐만 아니라 조직 내에서 자신의 말이 통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실감하고 있을 것입니다. 형장으로 가는 사형수와 마찬가지로 한순간이라도 빨리 떠나버리고 싶을 것입니다. 현재 돌아가는 분위기상 결과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고통의 기간과 강도는 줄어들 수 있습니다.

곤잘러스와 울포위츠 이야기를 길게 하고 있는데, 우리가 두 사람의 사건을 분석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사건은 일상생활 문제가 아니라 정치이슈이기도 합니다. 그래도 두 사람 이야기를 좀 더 한다면, 그들은 모두 조직의 최고책임자로서 부적절한 행동 때문에 형장으로 가야 하는 처지에 몰려 있습니다.

곤잘러스는 검사 8명을 해고한 데 대해 비판이 거세게 일자 당당하게 사실을 밝히기보다는 거짓말로 감추기 급급했습니다. 이는 고위 공직자의 전형적인 대응방식입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이 그를 외면하고 있습니다. 반대파가 적극적으로 공격하고 있습니다.

울포위츠는 세계은행 개혁이라는 사명을 띠고 총재가 됐습니다. 저항이 뒤따르게 마련인 과제를 맡은 셈입니다. 실제로 세계은행 관료조직은 깊숙한 참호 속에서 개혁에 저항했습니다. 그런데 여자 친구를 위한 영향력 행사 건이 발생했습니다. 저항하는 관료조직에 좋은 빌미가 된 겁니다.

물론 울포위츠의 주장대로 그의 행위에 도덕적으로 흠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현재 상황이 그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에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곤잘러스도 마찬가지입니다.

질문하신 분의 현재 처지는 곤잘러스와 울포위츠만큼 심각하지도 않고 세계적인 이목을 끌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곤잘러스ㆍ울포위츠 그리고 당신께 같은 조언을 드립니다.

지금 당장 떠나시오! 당신 자신과 조직이 무기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기 전에.

당신이 지금 그만둔다면, 연말까지 월급을 받지 못합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당신이 지킨 자존심과 조직을 위한 희생은 받지 못할 월급보다 훨씬 가치가 있습니다.

(잭 웰치는 GE 회장 시절 실적이 나쁜 조직을 과감하게 해체하고 불필요한 인력을 망설이지 않고 정리해 조직의 효율성을 극대화한 최고책임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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