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황제’ 푸이의 두 부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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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호 26면

앞줄에 앉아 있는 이들 중 오른쪽에서 둘째가 완룽, 셋째가 원슈다. 1920년대 베이징의 일본 공사관에서 촬영했다. 

청의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는 한날 두 명의 여인과 결혼했다. 원래 황후 후보는 네 명이었다. 사진을 놓고 한 명을 선택케 했다. 지독한 근시였던 푸이가 희미한 상태에서 보니 용모나 차림새 모두 비슷했다. 결혼에 관심이 없던 그는 별생각 없이 한 장을 집었다. 몽골족 출신 원슈(文繡)였다. 태후 한 명이 반대해 푸이는 다시 다른 사람을 골랐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⑤ ‘마지막 황제’ 푸이의 두 부인

완룽(婉容)이 황후로 낙점됐다. 원슈는 황제가 한 번 선택했다고 해 한 단계 아래인 황비가 됐다. 당시 푸이와 완룽이 17세, 원슈는 13세였다. 완룽은 미인이었으나 샘이 많고, 의지가 약했다. 원슈는 장난기 넘치는 용모에 고집이 셌지만, 드러내는 성격은 아니었다. 푸이는 이들을 거의 찾지 않았다. 완룽에겐 영어 이름도 지어주고, 가끔 자전거도 타게 했지만 원슈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완룽과 원슈는 푸이가 서로 상대에게 가 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푸이의 관심은 외국에 쏠려 있었다. 스스로 변발을 자르고, 인도 시인 타고르를 만나고, 일본 간토(關東) 대지진 때는 30만 달러어치의 골동품을 의연금조로 보내기도 했다. 이들은 1924년 자금성에서 쫓겨날 때까지 2년을 함께 살았다.

베이징을 떠나 톈진의 일본 조계(租界)에 살게 되면서 원슈에 대한 완룽의 행패가 심해졌다. 톈진 생활 7년 만에 원슈는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위자료 5만 위안(元)을 받았다. 상하이의 4인 가족 생활비가 40위안을 넘지 않을 때였다. 그러나 원슈는 변호사와 친지들에게 위자료로 받은 돈 대부분을 강탈당하다시피 했다. 원슈 나이 23세였다. 베이징으로 돌아온 원슈는 초등학교 교사, 화베이(華北)일보 교정 일을 했는데 신분이 알려져 그만두고 말았다. 이후 생계를 위해 공사장에서 막노동을 하고, 길에서 사탕을 팔기도 했다.

푸이는 원슈의 행동이 위자료를 탐낸 친지들의 부추김 때문이었고 다시는 결혼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원슈는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군 장교와 결혼했고, 1953년 심근경색으로 숨졌다. 푸이가 푸순(撫順)의 전범수용소에서 개조교육을 받고 있을 때였다. 완룽이 46년 아편중독으로 만신창이가 돼 이미 세상을 등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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