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분간 절에서 역사·철학 책 읽겠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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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호 19면

지난달 30일 오전 우리금융 주주총회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황영기 우리금융 전 회장의 얼굴은 매우 밝아 보였다. “섭섭하지 않으냐. 앞으로 뭘 하고 지낼 생각이냐”고 물었다. “섭섭하긴…. 언제 적 얘기를 하나. 정말 홀가분하고 기분 좋다”고 그는 답했다.

떠나는 황영기 회장

“문사철(문학ㆍ역사ㆍ철학) 책 100권 정도를 싸놨다. 경기도 인근 절로 당장 들어가 한 달 정도 아무 생각 없이 책 읽는 재미에 푹 빠져볼 생각이다. 곧 꽃도 필 테고, 주변에선 그런 내가 얼마나 부러운지 모르겠다고들 한다.”

절에서 나오면 부인과 함께 긴 일정으로 해외여행을 즐길 계획이라고 한다. “일본에 있는 친구들이 어서 오라고 한다. 세계 각국을 여행하면서 오래 못 봤던 친구들을 만나려고 한다.”

황 전 회장은 시장이 놀란 경영성과에도 불구하고 연임 도전에 실패했다. 그는 2004년 취임 때 “최고경영자(CEO)는 검투사와 같다. 검투사에게 패배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며 공격적 경영을 주도했고 성공적인 전과를 올렸다. 그가 땀 흘린 덕분에 정부는 우리금융에 투입한 공적자금(11조원)을 모두 회수하고도 수조원을 더 챙길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연임 가능성을 점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상황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3배수 후보에도 끼지 못하는 수모를 당했다. 최고위급 경제관료 출신인 박병원 전 재경부 차관을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정해진 시나리오에 희생됐다는 설이 유력하게 돌았다. 청와대ㆍ정부의 ‘괘씸죄’에 걸렸기 때문이라는 얘기도 나왔다. 그는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같은 대형 사안을 대주주인 예금보험공사와 사전 협의 없이 추진하는 등 평소 소신 있고 튀는 행보를 보였다.

우리금융의 한 임원은 “잠시 세월을 낚으며 기다려도 나쁠 게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황 전 회장이 보여준 성과가 분명한 만큼 ‘CEO 시장(市場)’이 그를 다시 부를 것이란 얘기다. 정치인이나 행정가로 변신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황 전 회장은 이임식에서 “남산 산책길에 피어난 벚꽃을 보고도, 밤늦게 불이 켜진 우리은행 지점의 간판을 보고도 우리은행과 임직원들을 생각하겠다”고 말했다. ‘검투사’ 황영기가 어떤 모습으로 돌아올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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